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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7. 2021

21세기 귀족(19)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3세기. 로마 빌라와 한니발전쟁)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19) : 고대 로마 토지사상(기원전 3세기. 로마 빌라와 한니발전쟁) -


기원전 3세기


지주들 중에 일부만 농지 근처에 빌라(villa, 대지주가 자신의 농지 근처에 지은 집)를 지어 거주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지주는 대도시로 이동하여 거주하면서 정치경제 생활을 누렸을 뿐더러 자신의 사유지에서는 일종의 치외법권까지 누렸다.[1] 중세 유럽의 영주들이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자치적, 자의적, 독립적 사법권을 누렸던 것과는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덜하지만, 그만큼 지주의 권리는 막대했다. 이것이 로마 지주귀족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자유로운 시민’의 생활이었다.[2]


1세기, 영국 다트포트에 세워진 로마 빌라의 복원도(© Historic England (illustration by Peter Urmston).) 주변은 넓디 넓은 농경지였을 것.


이는 그리스인이 생각했던 자유(권)과 상당히 유사했다. 따라서 자유로운 시민의 삶을 영위하려면 노동하지 않고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최상의 방법은 거대한 토지와 자신들의 생계를 대신 책임져 줄 소농들을 거느리는 것이었다. 명백하게 로마의 지주귀족들은 전혀 일하지 않고 토지의 수익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지대생활자였다.[3] 타인의 노력과 땀으로 편하게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로마가 부동산담보대출 등 토지와 관련된 금융제도가 일찍이 발달한 이유도, 시간이 지나며 로마 경제의 건전성이 나빠진 이유도 이렇게 지배 계층이 건전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토지금융수익 즉, 불로소득 지대로만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8]


앞서 언급한 다트포트 내 로마 빌라 유적지. 1월에는 휴관.(https://www.whatsonindartford.com/lullingstone-roman-villa/.)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막대한 재산을 유지해야 귀족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특히 정계에 진출하여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토지를 통한 막대한 재산 축적과 유지는 필수였다. 예를 들어 기원전 218년에 통과된 클라우디아 법안은 원로원 의원 또는 자식이 300암포라 이상을 수송할 수 있는 선박을 가지지 못하게 했는데,[4] 이는 선박의 제작이나 선박을 통한 상업활동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미 막대한 토지 재산을 가지며 경제활동을 할 필요가 없는 부유하고 자유로운 시민만이 최고위직에 오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최고의 유산자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그 법 기저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막대한 재산 대부분은 토지로 구성되었고, 또 토지로 구성되어야 했다. 그래야 토지담보대출을 통하여 남몰래 고리대금업을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막대한 부의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주귀족들은 토지 재산을 유지하고 영리하게 불려 나갔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권력과 명예 또한 놓치지 않고 착실하게 누적해 갔다.


필자 생각에 서양사 전체를 통틀어 고대 로마인들과 근대 영국인들은 어떤 국가의 사람들보다 토지에 대한 탐욕이 컸다. 카르타고와의 2차전 즉슨 2차 포에니(기원전 218~201) 전쟁 중에 벌어진 사건과 그 종전 이후 벌어진 총 세 가지 사건은 이에 대한 단적인 사례다. 첫째 사건은 로마 지주들이 매매를 위해 땅을 내놓았으나 한니발의 침입으로 적군이 그 땅에 들어섰다가, 잠시 군대가 외곽으로 물러난 그 사이에 그 토지를 매입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사건이다.[5]


두 번째 사건은 한니발의 칼날이 로마를 크게 위협하자, “원로원 의원 전원이 부동산을 제외한 전재산을 헌납하기로 결의”한 사건이다.[6] 즉, 로마인들은 자신에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한들 결코 토지만큼은 내놓지 못할 정도로 토지에 대한 욕심이 심했다.


<Hannibal crossing the Alps알프스산을 넘는 한니발>(Jacopo Ripanda.)


세 번째 사건은 종전 이후, 인류 최초로 공채 발행을 통해 승리했지만 로마 정부가 시민들에게 아직 갚지 못한 채무의 1/3은 공유지로 대체하겠다고 제시하자, 채권자들은 그 공유지가 로마 巿에 가까운 근교에 있기에 매우 흡족히 여겼던 사건이다.[7]


특히 셋째 사건이 주목되는데 그 이유는, 정량적으로 접근하긴 어렵지만, 동시대 다른 문명권에서보다 로마에서는 상대적으로 지가를 결정하는 요인 중 비옥도보다 위치가 더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후술될 여러 사건에서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은 현대인들이 런던이나 뉴욕 등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의 토지를 선호하는 경향과 완전히 동일하다.


한편 이러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아씨두이에 해당하는 재산이 절반으로 낮춰졌다. 언제부터 징병 기준이 토지가 아니라 동산(화폐)으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로써 토지 없는 자들도 징병 대상자가 될 수 있었으므로 점차 지주의 군역토사상적 부담이 토지 비소유자들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한 세기 전의 베이이(21세기 귀족(18)참고) 공성전 중에 있었던 사건과 비교하기에 매우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베이이 공성전 시기에는 비지주들을 지주들로 만들어 징병했지만, 이 시기는 비지주들을 지주들로 만들어주지 않으면서도 징병하는 간사한 묘수를 부렸기 떄문이다. 명백히 지주의 군역 부담이 비지주에게 전가된 것이고, 당연히 한 세기 전과는 달리 이에 대해 아무런 보상이나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가난한 집안의 아내들도, 징병 기준의 변화 때문에 자신의 남편들이 군대에 끌려가버려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군역토사상을 엄격히 지켜왔던 몇세기 전 조상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폐단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고전기 로마법상의 “허용점유(precariaum)”제도가 있어서 영세한 인민들이 대귀족으로부터 무상으로 토지를 대여 받아 그들을 배신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반영구적으로 점유했고, 귀족들은 그 대가로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9] 또한 무수한 전쟁들을 치르고 승리하면서 얻은 전리품으로서의 토지는 여전히 나름대로 고르게 분배되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기원전 264년부터 시작된 포에니 전쟁부터 기원전 133년까지 로마의 급속 팽창기였고 막대한 전리품의 대부분은 귀족들의 손아귀로 넘어갔지만 다행히도 넓어진 영토는 본래 토지 없었던 인민들의 생계에 도움이 되었다.[10]


허나 그 조차도 토지로부터 비롯되는 빈부격차를 전면적으로 예방할 수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제국으로 막대하게 공급된 노예와 토지양극화가 결합되어 새로운 경제체제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포에니 전쟁을 치르며 카르타고인들로부터 습득한 식민농장체제가 로마로 유입되었는데[11] 이것이 노예제와 결합되어 그 유명한 대토지농업체제(latifundium, 라티푼디움)를 만들어냈다.


이 체제는 초기에는 이탈리아 중남부와 시칠리아의 대지주귀족들이 주도하여 지역적인 수준이었으나[12]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은 임금을 줄 필요가 없는 노예들을 방대한 규모의 농장 즉, 거대한 장원에 동원함으로써 또 공유지를 선점하거나 임차함으로써(사실상 소유권 획득과 마찬가지) 거의 비용은 없다시피 농업생산을 했다. 미시경제적 관점에서는 즉, 지주귀족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소작인을 고용하여 경작하는 것보다 노예 이용이 더할 나위 없는 합리적인 경영 방법이었음은 분명하다.


점차 전체적으로 토지소유는 대지주귀족들이 가장 선호했던 재산에 해당했던 만큼 계속 방대해져만 갔고, 그들이 소작인 고용보다 노예 차출을 선호했으므로 농민들은 경제사회적으로 입지가 계속 줄어들어 계층 간의 격차는 증대되고 있었다. 게다가 시민으로서의 5년간의 군복무는 가계 경제에 큰 타격을 주기 마련이었다. 후술하게 될 공화정 말기에 정치, 경제, 사회적 모든 문제와 갈등의 씨앗은 대략 이 시기에 싹을 띄웠다.


이 시기의 로마 농민들은 훗날 자신들의 후손들이 사실상 노예 취급을 받게 되리라곤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공화정 초기를 지난 이후 귀족들이 주도적으로 수백 년 간의 정복전쟁을 치르는 것에는 명예 획득과 정계 진출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다분히 물질적⋅경제적 목적이 깔려있었다.[13] 이것이 바로 규모의 경제[14] 측면에서 영세농은 더이상 지주귀족들과 경쟁할 바가 되지 못했던 이유다.






이번 글에서는 기원전 3세기의 로마를 살펴보았다.


(1) 거대한 토지(라티푼디움)를 가진 로마인들은, 현대의 부동산 거부 및 건물주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이 자신의 노력과 땀을 늘려가기보다 토지를 늘려가기에만 혈안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평등사상, 토지공개념은 점차 퇴색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2) 그나마 군역토사상이라도 엄격히 지켜져야 했으나, '토지를 가진 자는 공익(참전 등)에 기여해야 한다'라는 그 사고방식도 희미해져갔다. 때문에 징병 기준이 토지가 아니라 화폐로 바뀌어, 토지 없는 가난한 민중들도 군대에 끌려갔음을 확인했다.



이는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위 같은 로마적 토지사상과 부동산제도는 오늘날에도 유효하고, 당신도 로마의 제도적/사상적 후손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선 기원전 2세기를 살펴보도록 한다.


References


[1]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333쪽, 379쪽.

[2] 상게서, 341쪽.

[3] 상게서, 337~338쪽.

[8] M. I. Rostovtzeff/지동식 옮김, 『서양고대세계사』(고려대학교출판부, 1986).)

[4] Titus Livius, Ab Urbe Condita book XXI. 63. 3.

[5] Livy, Book 21. 11; Simon Baker/김병화 옮김, 『로마의 역사』(웅진지식하우스, 2008.), 62쪽에서 재인용.

[6] 시오노 나나미/김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2』(한길사, 1995), 221쪽.

[7]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172~173쪽.

[9] 현승종, 『게르만법』(박영사, 2001), 316쪽.

[10] 김진경 외, 전게서, 309쪽.

[11] Max Kaser/윤철홍 옮김, 『로마법제사』(법원사, 1998), 117쪽.

[12] 김진경 외, 전게서, 438쪽.

[13] 상게서, 421~422쪽.

[14] 규모의 경제 : 생산수단의 규모가 거대해질수록 재화 한 단위를 생산할 때 필요한 비용이 줄어드는 현상 및 그러한 경쟁력. 일반적으로 대기업에 가까울수록 이러한 규모의 경제를 잘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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