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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28. 2021

21세기 귀족(20)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2세기)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20)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2세기) -


기원전 2세기


기원전 202년에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면서 로마는 공화정 후기에 들어섰다. 사실상 지중해 최고의 패권자가 된 로마였지만 그 실리는 모두 농업시대의 핵심인 땅을 차지한 지주귀족들의 손아귀에 있었고 그 방대한 공유지와 그로부터 나오는 소득은 귀족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제 전리품 중 하나인 토지도 그 분배에 있어서 평민들은 더 배척당했다.[1]


토지평등사상은 거의 완전한 소멸을 앞두고 있었다. 평민들은 아씨두이로서 군역을 이행하고 전역하여 집으로 돌아와도, 전장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혹은 그 복무 동안의 가계가 기울었기에 생계를 이어가는 것도 힘들었고, 결국엔 토지를 매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론 이 시기 즈음하여 본격적으로 노예제사회로 진입하는데, 당시에는 이탈리아와 중남부와 시칠리아에 한정되긴 했지만[2] 노예를 구매할 만한 재산을 가진 자들만 이를 통해 부를 늘릴 수 있고, 노예를 통한 경작이 소작인을 통한 경작보다 이익률이 높기 때문에 소작인 고용을 줄이니 빈부격차의 증대가 예견되었다. 더군다나 이론상으로는 국가가 개인에게 임대해준 토지를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는 것은 형식에 불과했고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그러할 수단도, 그럴 의지도 없었다.[3]


이는 토지법과 관련한 다음의 사건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기원전 2세기 초중반경, 호민관들은 농지규모법(lex de modo agrorum)을 제정하였다. 주요 내용은 100마리 이상의 큰 가축 혹은 500마리 이상의 작은 가축의 사육을 금지하며 500유게라를 초과하는 공유지 소유를 금지하고 이에 대해 벌금형으로 처벌하는 것이었다.[4] 헌데 기원전 167년에 카토(Marcus Cato, 기원전 234~149)가 이 법률에 반대하는 로도스인들을 위해 변호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카토라고 흔히 알려진 흉상. 당연히 그의 실제 얼굴은 아니다.(원작자 미상)


다음과 같이 규정한 법만큼 잔인한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략) 500유게라를 초과하여 점유할 의사를 가진 데 불과한 사람이 그렇게 처벌받도록 하거나, 규정된 가축 수보다 더 많이 가지고자 의도하는 데 불과한 자가 그처럼 유죄 선고를 받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더 많은 것을 점유하고 싶은 생각을 지닙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처벌되는 것인지요.[5]


이러한 상황을 일반화해보자면, 카토의 주장을 통해 당대 로마인들 특히 지주귀족들의 기억 속에서 토지평등사상과 토지공개념이 거의 사라졌음이 확인된다. 그들은 국가의 토지인데도 500유게라를 훨씬 초과한 대토지를 거느리는 것이, 또 이웃들의 가축이 목초지를 뜯어먹지 못할 정도로 내가 많은 가축을 거느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즉 토지와 토지에서 나오는 지대를 소수가 거의 독차지해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되려 토지를 늘리고 가축을 늘리고자 하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 “잔인”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200년 전의 리키니우스법과 정확히 정반대의 토지사상을 가지고 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들의 바람대로 이 법은 146년경 사법(死法)화 되어버렸다. 카토는 “자기가 상속받은 재산을 늘려 자손에게 남겨 주는 것은 가장 영광스럽고 신성한 일”이라고 했다.[6] 즉 당시 로마인들은, 건국초의 조상들과는 달리 자신의 토지와 그에서 나오는 지대를 토지공개념과 토지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이웃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되려 희소성과 필수성이 매우 높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토지를 마음껏 사유화하고 자손에게 대대로 물려주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이로써 로마에서 토지공개념과 토지평등사상은 거의 소멸했음이 확인되었다. 당시의 로마 시민원과 그 구성요소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한편 넉넉한 전쟁 전리품 덕에 기원전 167년 이래로 로마인들이 전쟁세(트리부툼)를 면제 받게 되어 로마 시민은 화폐 형태의 직접세를 낼 일이 없어졌다. 이에 따라 세금을 낼 경제력도 갖추지 못한 인민들이 아니라 넉넉한 경제력을 갖춘 지주들의 배가 더욱 불러왔다.


기원전 140년경 로마 제국의 공유지 면적은 전 국토의 1/7정도에 달했다. 그 공유지들은 본래 자영농 및 중산층에게 싸게 임대할 예정의 토지였으나, 지주귀족들은 그들을 위해 염가로 책정된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두고자 하여 ‘1인 500유게라 제한’을 가족 등의 차명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여전히 회피하고 있었다. 여러 방면에서 로마 지주들의 탐욕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당시 토지양극화는 계속 심화되었다는 것은 당대 기원전 167년의 인구조사 데이터에서도 확인되고, 군대 소집에 대한 인민들 불만이 끝내 표출되어 저항했던 기원전 151년과 기원전 138년의 사건들이 그 방증이 된다.[7]


 짧은 기간 동안 벌어진 이 일련의 사건들은 또 다른 네 가지를 말해준다. 첫 번째는 로마 시민권자로서 병역을 마치면 평생 직접세를 면제 받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두 번째는 토지나 금은보화 등의 전리품이 거의 다 귀족의 곳간으로 들어가 그들의 사리사욕만을 채우는 전쟁에 대한 인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는 것. 세 번째는 지주들이 영세한 인민들에게 우회적인 방법으로 떠넘긴 수년 간의 병역은 그 시작과 동시에 남아있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 네 번째는 거의 똑같은 내용의 법률이 재차 발의되고 제정되었다는 것은 거듭되는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토지 독점의 심화를 막을 실효가 전혀 없었다는 것.


또 이 시기에 법무관과 법학자들이 급변하는 정세에 맞추어 법 활동을 한 것이 그간의 법의 안정성을 무너뜨려 놓았는데[8] 이것은 과거의 고대 국가들이 법의 전통성을 중요시 여겼던 것과 상이한 모습인 동시에 로마법사상의 특징이었다. 언급했듯 로마의 법제는 공법보다는 전적으로 사법에 치우친 것으로, 이와 같은 특징은 특정한 이해관계가 얽힌 기득권층의 손으로 인해 의식적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법 활동과 법사상이 이렇게 변질되었을진대 과거부터 내려오던 지배계층에게 요구되었던 건전한 종교적, 관습적 의식들도 사라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9] 법은 정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지주귀족들의 이권과 만족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한편 이 시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여러 차이점 중 하나가 극명히 드러난다. 그리스와 로마 모두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만이 병역 의무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리스도 토지양극화가 심화되며 시민의 숫자가 줄어들어 국력이 쇠해졌으나 군대 소집에 저항하여 일어난 봉기는 없었다. 언급했듯 오랫동안 영광과 명예, 자부심으로 여겼다. 허나 로마는 병역 기준이 토지 재산에서 화폐 재산으로 바뀌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준이 낮아졌다. 병역 면제 기준이 되는 재산은 지난 세기인 기원전 241년 이후에는 12,500아세 미만, 기원전 146년에는 4,500아세 미만, 기원전 130년경에 1,500아세로 계속 내려갔다. 이로써 인민들은 토지양극화의 심화로 더욱 가난해져도, ‘병역재산기준이 낮아짐으로 인해’ 징병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는 시기에 이러한 기준의 하향은 표면적인 수치보다 더 비참한 경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반대로 최고위 1계급의 재산 기준은 기원전 240년에 10만 아세 초과, 140년대에는 100만 아세 초과였는데 이는 극도의 양극화 진행을 명백하게 대변해주기도 한다.[10] 결국 토지가 없는 극빈자라도 시민권 보유자라면, 사실상 군역을 면제 받을 수 없어 군대로 끌려갔다.


당시의 로마 시민원과 그 구성요소를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수 세기 전에는 ‘군역토사상이나마’ 정의로워서 극빈자는 전쟁세와 군역에서 면제 받았던 시기는 현재와는 완벽히 단절된 과거에 불과했다. 이를 고려하면 이 시기 즈음에 군대 소집에 대한 봉기가 일어났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울 정도다. 현대에는 국가마다 기준이 다를 수 있으나, 위와 같은 상황은 오늘날 한국과 같이 징집 병역제도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처럼, 로마의 징병제는 수백 년을 거치며 가난한 이들에게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생시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국가의 보조가 없으면 병역에 복무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보조가 있으면 기꺼이 전장으로 나간다”라고 했는데,[11] 그보다 2~3세기가 지난 후인 지금의 로마를 보라. 가난한 자들에게 보조금을 손에 쥐어주고 전쟁터에 보내기는 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병역재산기준을 낮추어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가난한 사람을 전쟁터로 떠밀고 있다.


지주들은 지난 수 백년 동안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이었던 군역토사상을 떨어내고자 했고 그 과업은 동시대 어떤 문명권에서보다 성공적으로 진쟁되고 있었다. 그 쐐기는 머잖은 시기인 기원전 107년의 군제개혁이 될 것이다. 토지 없는 빈자들은 지킬 재산이 없으니 전쟁이 발발해도 토지양극화 이후의 그리스인들이 그랬듯이 기꺼이 싸우려 했던 마음이 들지 않았고 자식들을 가르칠 돈도 없었고, 자유인 인구는 줄어들었다.[12]






이번 글에서는 기원전 2세기 로마를 살펴보았다.


(1) "토지만큼은 무제한 소유해서는 안된다(토지공개념, 토지평등사상)"라는 사상과 법은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국민이 일정 수준 이상의 부동산을 가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저멀리 내던져버린 것이다.


(2) "토지 있는 자들만 군대에 간다(군역토사상)"라는 사상이 사라지고 그 징병 기준이 화폐로 바뀌는 것도 모자라, 그 화폐 기준도 점점 낮추어 최하위 극빈자들까지도 군대로 끌고 갔다. 남은 가족(처자식)들은 더 가난해졌다.



남 얘기가 아니다.



References


[1] Max Kaser/윤철홍 옮김, 『로마법제사』(법원사, 1998), 61쪽.

[2]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438쪽.

[3] G. Tibiletti, “Lo Sviluppo del Latifondo in Italia dall’Epoca Craccana al Principio dell’Impero,” Relazioni del X Congress Internazionale di Scienze Storiche II(Roma, 1955), p.251; 김진경 외, 상게서, 444쪽에서 재인용.

[4]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64~67쪽, 150쪽.

[5] Livius, Ab Urbe Condita, book 45, 25. 2; 허승일, 상게서, 150쪽에서 재인용.

[6]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현대지성사, 2000), 580쪽. 원문은 Plutarch, Cato.

[7] 김진경 외, 전게서, 310~311쪽.

[8] 김세신, 『서양법제사론』(법문사, 1990), 60쪽.

[9] Kaser/윤철홍 옮김, 전게서, p.129.

[10] 안재성, 『풍요와 거품의 역사』(을유문화사, 2018), 41쪽.

[11] Aristotle/손명현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동서문화사, 2016), 404~405쪽. 원문은 Politika, 4.13.

[12]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I』(현대지성사, 2000), 1506쪽. 원문은 Plutarch, Tib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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