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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Nov 30. 2021

21세기 귀족(21)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2세기.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21)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2세기.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


전통적 토지사상에 입각한 토지법이 제정되어도 실효를 발휘했던 시절은 끝이 났으며 그 법의 힘보다 지주귀족들의 힘이 더 강했다. 이러한 로마의 토지양극화가 야기한 인민들의 당시 생활상은 뻔했다. 등가죽이 등에 붙은 빈민들의 생활터전에는 흙과 나뭇가지로 지어진 집들도 있었고, 그 안에서도 칸을 나누어 여러 빈곤한 가정이 살았고(이런 다세대 주거지를 인술라이insulae라고 했다), 현저하게 수준 낮은 거주공간에도 세입자는 넘쳤고, 당연히 이곳저곳에는 부동산 광고가 붙어있었고, 부동산 투기 문제의 지속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임대료와 도심 노숙자 문가 발생했다.[1]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로마 인술라이(photo : Lalupa.)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주귀족들이 경영 효율을 위해 자국의 소작농이 아닌 노예만을 농지에 투입하므로 소작농이 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운 좋게 자기 땅을 가지고 농민의 삶을 살더라도 극빈자조차 피할 수 없는 5년간의 병역은 그 가장이 자리 비운 사이 가정의 경제적 파산을 야기했으며 언급했듯 병역재산기준이 계속 낮아지기에 빈곤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결정적으로 기원전 140년경 이후 대흉작, 노예 전쟁 등이 발생했다. 농사를 제대로 짓는 인민들이 없다시피하는 상황에 이런 대재앙이 덮치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곡가는 기원전 140년경에 비하면 127년에 약 1200%에 달했다.[2] 위의 하늘(대흉작)도, 아래의 땅(토지양극화)도 빈민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은 혁신적이어서 역사에 남은 것이라기보다는, 위와 같은 시대 배경에서 수 세기 동안 귀족과 원로원의 토지사적 전횡으로 인해 수백 년 간 사실상 사법(死法)이었던 농지법의 부활을 꿈꿨기에 주목받았던 것이었다. 먼저 형제 중에서 형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는 기원전 134년에 농지법(lex agraria)를 제안하며 이렇게 연설했다. [괄호 안의 말]은 필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


16세기에 그려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얼굴(Guillaume Rouille, Promptuarium Iconum Insigniorum, 1553.)


이탈리아를 떠돌아다니는 야수들은 각자의 굴이나 구멍이 있어서 웅크리고 쉴 수 있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고 죽은 남자들은 공용의 공기와 빛을 누릴 뿐 아무것도 없다. 집도, 고향도 없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대지 위를 방랑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우리의 장군들이 선조들의 무덤과 신전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투에 나가기 전에 병사들에게 한 연설은 거짓말이고 조롱이 되었다. 그들의 말을 들은 병사들 가운데 한 사람도 가족 제단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런 로마인들 중 단 한 사람도 선조들의 무덤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들[토지비소유자]은 다른 사람들[대지주 및 권력자]의 재산과 사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죽었다. 그들은[대지주 및 권력자] 세계의 주인이라 불리지만 그들[토지비소유자] 자신은 작은 땅 한 뙈기도 자기들 몫으로 갖고 있지 않다.[3]


위 발언처럼 시민 중에 “땅 한 뙈기”도 없는 빈민들이 많아졌다. 토지주권사상도 사실상 소멸한 것이다. 당시의 로마 시민권과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그의 농지법의 주요한 세 가지 골자는 첫째로 500유게라(자녀가 둘 있다면 총 1000유게라)를 초과하는 공유지 불법 점유는 그 초과분을 몰수하는 것이고, 둘째로 몰수한 공유지는 토지가 없는 빈민계층에게 30유게라 이하의 크기로 영구 임대하는 것이고, 셋째로 해당 토지를 임차한 자는 이를 양도 및 매각할 수 없으며, 오직 농경을 하며, 소액의 세금(지대)를 납부하는 것이다.[4]


명백하게 첫째와 둘째에서 토지주권사상과 토지평등사상의 부활을 의도했음이 확인된다. 셋째에서도 위 법의 수혜자들에게 해당 토지에 대한 처분 제한을 두고 있기에 토지평등사상에의 의도가 확인된다. 왜냐하면 농지법의 수혜를 받은 농민들이 토지를 자의든 타의든 해당 토지를 잃지 않고 납세와 군역을 이행할 수 있는 자영농으로 성장하게 하여, 중산층의 증가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5]


그는 최우선적으로는 곡식난을 해소하려 했으며[6] 그 핵심적 해결책이 토지개혁 및 재분배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위 법이 지극히 토지주권사상, 토지평등사상의 부활을 의도하는 이유는 바로 이에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빈곤 극복, 중산층 인구와 출산율의 증가, 국가 재정 개선, 국방력의 강화 등 다양한 문제를 하나의 방책으로 해결할 수 있음은 자명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산재한 여러 문제들을 거의 모두, 단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제도개혁은 부동산제도의 개혁뿐임을 간파했던 인물들이었다.


헌데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은 반 세기 전의 농지규모법의 수준을 넘어서 범법자에 대한 처벌은 초과 토지의 ‘몰수’로 규정했다. 몰수라는 단어에 지주귀족들의 전례 없는 분노와 반대가 일었다. 심지어 본래 그의 계획은 수도인 로마巿에 매우 가까운 공유지들을 몰수하려는 것이었기에[7] 그곳의 엄청난 부동산 가치를 상실하게 될 지주귀족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8]가 주를 이루었던 민중파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그나마 간신히 133년에 통과되었지만 그는 곧 원로원 세력에 의하여 몽둥이에 맞아 살해당했다. 그의 농지법은 그 실행위원회 의원들 모두가 원로원 출신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법화되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죽음Mort de Tiberius Gracchus>(Lodovico Pogliaghi.)


원로원 의원들을 비롯한 지주귀족들은 더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공유지는 국가로부터 임차한 토지이기에 엄밀히 말하자면 국유지인데, 곧이어 이를 매각할 수 있는 법까지 제정될 정도였다. 공유지에 대한 처분권까지 넘보고 이를 취한 것이다. 이제 지주들은 국가의 땅조차도 마치 자신의 동산처럼 쉽고도 합법적으로 처분할 수 있게 되었다.


헌데 자신의 토지를 팔기는커녕 이 법을 악용하여 여러 방법으로 반강제로 빈민들이 그들의 토지를 자신에게 팔게 했다.[9] 법을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로마적 법사상이 지극히 악용되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렇게 합법이라는 탈을 써서 탐욕스레 매입하며 토지 재산을 증식했다.






저번 글에 이어, 이번 글에서도 2세기 로마인들의 생활상과 역사를 살펴보았다.

  

(1) 토지평등사상, 토지주권사상, 군역토사상을 잃어버린 로마의 빈곤계층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빈곤은 이게 끝이 아니오, 토지양극화가 계속 진행됨에 따라 더 심해질 것이다.


(2) 과거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올바르고 정의롭고 평등한 토지사상과 토지제도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에 대해, 부동산 기득권층의 극심한 반발을 보았다.


이런 역사는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References


[1] Simon Baker/김병화 옮김, 『로마의 역사』(웅진지식하우스, 2008.), 83~84쪽.

[2] Henry C. Boren, “The Urbanside of the Gracchan Economic Crisis”,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vol. 63(1958), Oxford University Press, p. 898;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48~49쪽, 133쪽에서 재인용.

[3] Baker/김병화 옮김, 전게서, 100쪽.

[4] 허승일, 전게서, 77~78쪽.

[5] 상게서, 77~78쪽.

[6] 상게서, 183쪽.

[7] 상게서, 169~171쪽.

[8] proletaria. 무산자를 뜻하는 오늘날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는 당시 로마에서 최하층을 의미하는 라틴어 proletariatus에서 유래했다.

[9] Appianus, Bellum Civile, I. 27;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445~446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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