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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02. 2021

21세기 귀족(22)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2세기. 가이우스와 마리우스)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22)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2세기. 가이우스와 마리우스) -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형의 정신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였다. 식민지 개척 후 발생한 빈자들에게 토지 분배, 낮은 가격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법 등을 제정하였다.[1] 기어코 123년에는 곡물법(lex Sempronia frumentaria)을 입법시켰다. 이 법은 상당한 실효를 발휘하여 빈부를 막론하고 곡물 배급을 신청한 모든 로마 시민 남성에게 일정량의 곡물을 배급하였고 결과적으로 당시의 경제사회적 문제를 크게 개선했다는 점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2]


<평민민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addressing the Concilium Plebis)>(Silvestre David Mirys.)


그러나 곡물법 제정 후 2년이 지나 뜻을 펴보지 못하고, 형 티베리우스처럼 원로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더불어 토지제도의 변화를 가져오진 않았다는 것은 토지법제사적으로 명확한 한계점이었다. 이윽고 기원전 111년에 제정된 또 다른 농지법으로 지대를 납부할 의무마저 폐지되고,[3] 토지 양도의 자유가 완전히 합법화되었다. 기원전 133년의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으로 30유게라를 할당 받은 영농인들은, 그나마 기원전 111년의 농지법 덕에 30유게라를 초과하지 않는 자신의 토지에 대하여 사실상 사유화가 보장되었으므로[4] 안도의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법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14행에 해당하는 아래의 내용이다.


농경을 위해(agri colendi causa) 그 농지를 30유게라보다 많지 않게(non plus xxx) 점유하거나 보유하였다면, 그 농지는 사유지가 되도록 한다.[5]


또한 그 외의 내용 중 공유지에 대한 선점을 금하고 담을 쌓는 등의 배타적 이용을 금하는 내용과, 일정 개체 수 이하의 가축을 가진 자에게는 면세 혜택을 주는 내용이 있는데[6] 이에서 토지공개념과 토지평등사상을 부활시키려는 취지가 확인된다.


또한 유구르타 전쟁의 개시 직후에 제정된 법으로서 군비 마련을 위한 목적도 있음을 고려한다면[7] 그 군비 부담을 지주에게 물리는 것이므로 군역토사상을 부활시켜는 취지도 적지않게 엿보인다. 다만 원로원 등의 大지주들이 군비 부담을 가장 많이 져야 했기에, 공유지를 분배 받은 수많은 小지주들과 함께 이 큰 부담을 나누어 지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8] 결국 5백년 전부터 그랬듯이 빈민을 위하는 고운 마음은 전혀 없었고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하려는 우회적 묘수였을 뿐이었다.


한편 국내 최신의 연구는 토지법제사적으로도 놀라운 발견을 했다. 해당 농지법의 일부의 규정은 사유지에 대한 지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방을 위한 유지보수의 의무를 지주에게 부과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국가 및 공익을 위한 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특히, 당사자가 토지 소유에 따르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에 대한 처분에 관한 법 내용에서 ‘아드트리부티오(Adtributio)’라는 표현이 전쟁세를 의미한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9]


그 지주로 하여금 국방에 기여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국방과 직결된 토지공개념의 잔존과 그 부활 의도가 명백히 확인되는 부분이다. 다만 언급했듯 大지주들의 공익 기여의 정도는 그들이 취하는 이득에 비해 큰 부담은 결코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이처럼 활짝 열린 무제한 토지 사유의 시대는 당연히 수백 년 전 그리스의 경우에서 잘 확인했듯이 오히려 인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왜냐하면 500유게라를 넘는 공유지 점유자들은 그다지 크기 않는 조세(대략 곡물의 1/10과 과일의 1/5)를 납부하면 합법적으로 이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10] 토지양극화는 장기적 관점에서 해소될 리 없었다. 또한 인민들이 자신들의 농지를 지켜냈을 지라도 지난 수백 년 간 농지 크기나 생산에 있어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 귀족들을 시장에서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마저도 아주 약간의 재산이 있기라도 하면 징집대상이 되어 생계를 포기하고 (본래는 가지 않아도 될)군대로 끌려갔다.


10년에 가까운 군 복무를 마치고 운 좋게 몸 성히 돌아온다고 한들 가계 경제는 파산해 있거나 파산 직전인 경우가 허다했다. 이렇게 중산층이 얇아지는 것은 물론이었다. 극빈층 즉 끝끝내 징집대상으로 선정되지 못한 무산자들은 당연히 국가 경제 및 국방력에 기여하지도 못했다. 이런 현상이 심화되자 양극화는 멈출 줄 모르고, 국가재정의 건전성은 양질로 떨어지고 시민권자의 수, 입대자의 수도 줄었다.[11]


이 모든 것들은 토지양극화에서 나왔다. 전술했듯 그 토지양극화는 사유지에 대해서 지주가 절대적 권리를 행사하며 그 지대를 이웃과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로마적 토지사상에서 나왔다.


로마사 최초의 혁명 사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107년에 마리우스(Gaius Marius, 기원전 157~86) 장군이 군제개혁을 통해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바꾸었던 것은 위와 같은 배경 때문이었으며 언급했듯 군역토사상의 소멸에 결정적 쐐기를 박았다. 물론 귀족들은 국방의 약화를 걱정하기 보다는 모병제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병역 의무가 사라지니, 즉 인류사에서 오랫동안 자신들의 어깨에 있었던 군역이라는 짐이 사라지니 즐거이 쾌재를 불렀다. 게다가 직접세를 대신하고 있었던 군역이 더이상 필수가 아니게 되었으니, 사실상 세금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이우스 마리우스 장군의 흉상(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rius_Glyptothek_Munich_319.jpg.)


기원전 200~168년 로마인의 평균적 군 복무 기간은 7.74년이었지만, 군제개혁의 실시 시기를 포함한 기원전 167~91년에는 3.38년으로 거의 정확히 반토막이 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한때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 즉, 지주들에게 최우선적으로 요구되었던 국방의 의무는 이제 심각하게 퇴색되었다. 스파트타에서는 가진 것 없는 극빈층은 멸국까지 군역에 종사할 필요가 없었으나 로마는 이를 위와 같이 우회적인 방법으로 자국의 극빈층에게, 지주가 피와 살로 감당해야할 군역이라는 전통적 부담을 떠넘긴 것이다.


이로써 군역토사상은 로마 제국에서 깨끗히 소멸하였다.




다만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을 쥐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군역을 이행해야 했던 분위기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세한 로마 시민들을 지긋지긋 괴롭혔던 징병제의 폐지로 로마 병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까.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극빈층이 너무 두터워진 까닭에 안정적인 직업 군인이라는 직업을 원하는 자원입대자가 충분했다. 안타까운 문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그리스처럼 군인에게 토지소유와 그 생계를 상당히 보장해줬던 것과는 달리 봉급도 적고 오랫동안 복무한 이후의 퇴직금도 여생을 위한 준비금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재위 중에 가장 큰 관심사는 국방력을 위해 군사들의 충성심을 유지하려 했고, 이에 따라 보상 증대 차원에서 봉급을 상당히 올려주고 퇴직금도 현금과 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해주었다. 이는 병사 개인으로서도 최악의 가난에서 벗어나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기도 했다.


로마는 건국 이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이 시점까지도 토지양극화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스에서는 시민권의 여부가 토지 소유의 여부를 직접적으로 결정했지만,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토지 재산이 거의 없는 이들이 많았다. 토지 재산이 없는 자들이 토지와 정치권력을 동일시 여기는 로마 정계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행히 호민관 스프리우스 토리우스가 제정한 법은 더이상의 공유지 분배를 금하고, 공유지 보유자가 지대를 낸다면 그에게 귀속되도록 하고, 그 지대수입은 분배되게 하였기 때문에 인민들은 한 숨 돌릴 수 있었다.[12]






저번 글에 이어, 이번 글에서도 기원전 2세기 로마를 살펴보았다.


(1) 자신의 형이 토지개혁 중에 암살당해 실패하였지만, 그 동생 가이우스 또한 부동산 상실하여 가난해진 자들을 위해 개혁을 실시하였다. 부동산 기득권층의 반발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2) 로마 땅에서 이젠 군역토사상은 깨끗이 소멸하였다. 과거엔 부동산이 있는 자들만 군대에 갔으나, 이젠 사실상 부동산 없는 가난한 자들만 군대에 간다. 이러한 역전 현상은, 한국을 제외하고 모병제를 택하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가난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들이 군 병력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오늘날과 다를 바 무엇인가?


가이우스와 마리우스. 이름은 비슷한데 토지법제사적으로 상반되는 길을 걸었다.



References


[1]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I』(현대지성사, 2000), 1526~1527쪽. 원문은 Plutarch, Caius.

[2]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254~255쪽.

[3] Appianus, Bellum Civile, I. 27;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445~446쪽에서 재인용.

[4] 허승일, 전게서, 72~73쪽.

[5] 상게서, 74쪽.

[6] 김창성, “로마 공화정기 방목세 징수와 기사신분의 역할”, 「서양고전학연구」(2010.3), 74쪽, 81쪽.

[7] 김창성, “로마 공화정 後期 마리우스의 兵制改革과 國家財政”, 「역사교육연구회」62, 1997, 112~113쪽.

[8] 상게서, 108쪽, 121쪽.

[9]김창성, “기원전 111년 농지법에 나오는 Viasii vicani의 기능과 Adtributio의 의미”,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20).

[10] 허승일, 전게서, 73쪽.

[11] Appianus, Bellum Civile, I. 27; 김진경 외, 전게서, 445~446쪽에서 재인용.

[12] 상게서, 같은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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