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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06. 2021

21세기 귀족(24)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와 키케로(i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24)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와 키케로(ii) - 


기원전 4세기부터 이 시기까지 300년 동안 발생했던 토지개혁들은, 엄밀히 말해서 개혁이 아니었다. 앞서 확인했듯이 기원전 367년부터 500유게라를 넘는 토지점유는 불법에 해당되었음으로 기존의 법을 준수하자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토지개혁이 실행된다고 해도 본래 인민들의 것이었던 권리들을 돌려주는 것이며,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들 뿐 손해는 아니므로 지주들은 불만을 표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


설령 지주귀족이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인정하더라도 그 이하 영세한 인민에게 분배되는 것임으로 그들 이외에 (키케로도 ‘인민’이라고 지칭하는)로마 인민 모두가 경제적 손해를 입는 것이 아니다. GDP는 전혀 줄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제사상’을 근거로 키케로는 손해라고 주장한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카이사르의 집권 즉, 민중파의 최종 승리가 확정된 시기에 쓰인 기원전 44년의『의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국가 행정을 담당해야 할 사람이 제일 먼저 주의해야 할 점은 각자 자기의 것을 소유하게 하며, 사유 재산에 대해서는 국가의 간섭에 의한 침해야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필립푸스는 호민관직에 있을 때 위험하게도 농지 법안을 제출했지만 (중략) “나라 안에 재산을 가진 사람이 2,000명도 못 된다”는 저 말은 악의에 차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재산의 평등을 들먹이는 저 연설은 극형감인데, 이보다 더 큰 파멸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각자의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는 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공화국 제도와 시민 공동체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후략)[1]


그는 표면적으로나마 그리스인들의 신법사상을 쫓아서 법은 마땅히 양심과 이성에 부합해야 한다는 주장, 법의 근원은 도덕법과 신이며 법은 인민의 이성의 표현이므로 신의 이성과 공통된다는 자연법사상[2]에 근거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3] 


허나 동시에 당시 민중파와 원로파가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갈등하는 상황에서, 케케로는 파를 막론하고 정치를 맡은 자가 취해서는 안 되는 행동으로서 공권력으로 개인들의 재산에 간섭하지 말 것을 위처럼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우선시 되는 경제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기에 개인의 재산에 간섭하여 손해가 일어나는 것은 건국 목적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잘 드러나듯이, 이러한 사고방식은 마치 토마스 홉스의 사회계약설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목적으로 개인들이 모여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기어코 그의 생각, 즉 카이사르와 그 이전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 등의 개혁 이전의 로마 사회의 ‘절대적, 개인적, 배타적 토지사유제가 이상적이다, 자연스럽다’라는 생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편 위 키케로의 발언에서 등장하는 호민관 필립푸스의 연설에서, 어느 정도 과장이 있겠지만, 당시의 상당한 빈부격차가 확인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호민관 필리푸스가 내놓은 농지법에 대해 키케로는 그 법의 토지평등사상적 의도를 확인하고 “재산의 평등을 들먹이는 저 연설은 극형감인데”, “파멸적인”이라는 자극적 어구를 두 번 사용하며 위처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바람대로 그 법은 부결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포풀라레스[4]가 되기를 원하고, 또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토지 선점자들을 그들의 거처에서 내쫓기 위해 농지법을 통과시키고자 하거나, 채무자들에게 부채를 말소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공화국의 주춧돌들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우선 첫째 그들은 화합을 깨뜨리고 있으니, 일부의 사람에게서 빼앗은 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어질 때에 화합이란 있을 수 없다. 둘째 그들은 형평을 깨뜨리고 있으니, 만약 각자가 자기 것을 소유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형평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후략)[5]


(전략) 그런데 다년간 또는 수 세대에 걸쳐 소유했던 농지를 재산이라고는 전혀 가지지 못했던 사람이 가지게 하고, 반면에 가졌던 사람이 재산을 잃게 하는 것이 어떻게 형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6]


(전략) 사람들이 타인의 집에서 세도 내지 않고 살게 하라는 칙령이 있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내가 집을 사서 짓고 유지하면서 모든 경비를 지출하는 것이 네가 내 동의도 없이 내 의사에 반하면서 내 집에서 잘 살게 하기 위해서인가? 어떤 사람에게서 그에게 속한 것을 빼앗고,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것을 주는 것, 이것은 다른 게 뭔가?[7]


일반화 해보자면 키케로로 대표되는 당시의 로마의 지주귀족들은 토지를 빈민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고 명백한 불의라고 여겼다. 이에 대해 국가는 사후(事後)에 처벌을 내리는 역할을 넘어서서, 시민의 재산을 적극적으로 사전(事前)에 보호하는 역할을 할 것과 한층 더 직접적으로 법의 재산 보호 기능을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유재산권의 확보는 기존의 로마 정치 시스템, 즉 유산자들이 그 외 인민들을 다스리던 과두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직결되는데,[8] 이때의 사유재산이라 함은 토지와 거의 동의어임은 물론이다.


기원전 59년에 제출했던 카이사르의 농지법은 약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다시 제출된 토지개혁법안이었다. 자국의 역사를 통해 토지개혁법안을 내놓는 것은 거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임을 누구나 알았기 때문에 카이사르와 같이 절대적 힘을 가진 자가 출현하여 제안할 때까지 이렇게 꽤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거센 원로원의 반대가 예상되기에 어느 정도 현실적인 타협점을 찾아냈다. 


첫째로 일단 예전 법안과 같이 이를 국유지에 한정시켰다. 


둘째로 국유지의 임차권은 20년 후에 양도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조건도 내놓았다. 왜냐하면 한 세기 전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의 내용처럼 양도할 수 없게 한다면 귀족들은 합법적으로 농민의 땅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극도로 반대할 것이 역사적 경험에 의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셋째로 부정 임차지를 환수한 이후의 보상금은 동맹자 폼페이우스가 국고에 바친 2억 세스테르티우스로 충당한다고 하였고, 보상금의 액수도 원로원이 결정하게끔 유도하였다. 


넷째로 캄파니아는 국유지임에도 원로원들이 가장 아끼는 노른자위 땅이었기에 제외시켰다.(후에는 포함시켰지만 말이다) 키케로가 선봉이 되는 원로파와 그들의 반대는 변함없었지만 이제는 민중파의 세력이 하늘을 찔렀기에 판도는 바뀌었다. 로마 제국 최고의 정치, 군사 권력자가 이를 발의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함으로써 토지개혁 시도는 지지부진 끝나버렸고, 지난 한 두 세기 동안의 토지개혁적 법들과 같은 토지법은 로마가 훗날 멸국할 때까지 다시 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 약 기원년까지는 국방에 대한 부담을 지주가 담당해야 한다, 국방을 담당한 자는 토지와 관련된 권익을 주장할 수 있다, 라는 군역토사상이 ‘부분적으로나마’ 잔존하던 시기임을 명백히 대변해주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첫째는 원로원이 기원전 43년부터 제대하는 군인들에게 돈과 토지를 지급하기로 결의했던 사건이다.[9] 궁극적인 목적은 옥타비아누스의 군을 도와 안토니우스의 군을 물리치기 위함이었으니 군역토사상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지주귀족들의 실리적인 선택에 가깝지만, 의도야 어쨌든 군역을 이행한 자들은 일정한 토지를 보장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기원전 42년에 발생한 필리피 전투 이후, 최소 10만의 퇴역 군인이 토지를 받았다.[10]


둘째는 로마에서 속주민들이 지불하는 10%의 토지세를 ‘스펜디움’이라고 불렸고 이 단어를 직역하게 되면 ‘급료’라는 뜻인데 국방에 책임을 지지 않는 속주민이 내는 토지세로서 로마 군인을 위한 급료로 쓰였다는 것이다.[11]


셋째는 속주민 출신인 자가 로마 군인이 되었다면 토지세를 면제 받았다는 것이다.


기원후의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카이사르 시대의 부동산과열과 당시의 로마적 토지사상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일화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카이사르가 수도에 ‘카이사르 포룸’을 건설하려고 할 때 부지매입 비용으로만 6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하였다. 당시 카이사르 시대의 병사의 연봉 520세스테르티우스를 보수적으로 계산하여 오늘날의 1만 달러라고 가정하였을 때 이는 오늘날 금액으로 11억 달러 정도가 되겠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카이사르 포룸'의 잔해(https://orpheogroup.com/orpheo-enters-caesars-forum-in-rome/.)


카이사르에게 그 부지를 매각한 자는 매입 금액과 매도 금액의 차익 즉, 개발이익은 고대적 토지사상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을 막대한 불로소득이겠지만, 로마의 특수한 토지사상은 재산의 소유권을 노동보다는 자본 즉, 재산을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문제 될 일이 없는 사건이었다.


'카이사르 포룸' 풍경의 상상도(http://www.creatinghistory.com/the-forum-of-julius-caesar/.) 부지가 넓은 것도 아닌데 1조라니


한편 한 세기 이전의 티베리우스의 농지법으로 발생했던 로마사 최대의 정치 위기의 원인에 대하여, 어느 학자는 그 농지법에 로마 巿에 매우 가까운 공유지들을 몰수 및 분배하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12] 카이사르가 지불했던 위의 막대한 지가를 고려해보면 아주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주에게 해당 토지에서 나오는 모든 지대를 보장해주는 문명권에서 ‘부동산은 첫째는 위치, 둘째는 위치, 셋째도 위치’라는 말은 언제나 옳은가 보다.


그만큼, 대표적으로 로마 巿의 토지 등 부동산은 지나친 거품이 끼어 있었고 심각하게 과열되어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토지양극화 및 부동산 과열은 결국 티베리우스 황제의 재위 중이었던 서기 33년에 부동산담보대출과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금융위기 발생 원인으로 크게 작용했다.






저번 글에 이어서 이번 글에서도 카이사르와 키케로로 대표되는, 기원전 1세기 로마 내에서의 토지사상의 급변과 피로 물든 충돌을 살펴보았다. 


잠깐만, 서기 33년 로마에서 부동담보대출과 채무불이행으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독자들도 모두 겪었던, 2008년의 아픈 추억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서술한다.



References 


[1] Cicero/허승일 옮김, 『의무론』(서광사, 2006), 제 2권. 73.

[2] 자연법사상 : 특정 명제가 사람의 본능과 이성에 합치되고 어긋남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이는 태초적, 항구적 효력을 가진다는 법사상. 고대인들은 신적 존재의 뜻과도 연관하여 이 사상을 가졌으나 중세 이후 부활한 자연법사상에는 신적 존재와의 연관성보다 이성과의 연관성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3] Cicero/성염 옮김,『법률론』(한길사, 2007.), 2.4.10.

[4] 포풀라레스 : 포퓰리스트. 대의보다는 민중의 정치적 지지와 인기만을 위한 목적으로 하는 정치가.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5] Cicero/허승일 옮김, 전게서, 제 2권. 78.

[6] 상게서, 제 2권. 79.

[7] 상게서, 제 2권. 83.

[8]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95), 295~296쪽.

[9] 상게서, 364쪽.

[10] J. kromayer, Neue Jahrbuecher fur das klassische Altertum 33, 1914, p. 161; 임웅, “문헌사료를 통해서 본 로마의 colonus”,「사총」55(2002), 307쪽에서 재인용.

[11] 시오노 나마니/심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6』(한길사, 1997), 242쪽.

[12] H. H. Scullard, “Scipio Aemilianus and Roman Politices,” 63; 허승일, 『로마 공화정 연구』,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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