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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07. 2021

21세기 귀족(25)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1세기. 부동산발 금융위기(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25) : 고대 로마의 토지사상(1세기. 부동산발 금융위기) - 



챕터 4-2 : 아우구스투스부터 서로마 멸망까지  


1세기


카이사르가 죽었고,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로마사 첫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원수정(원수가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체제)이 성립하여도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다는 것 외에 경제사회적 구조의 큰 변화는 없었다. 대장원을 경영하는 지주귀족들이나 정부 관료 등의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무산자계급(프롤레타리아)은 생계의 터전이 되는 땅이 없었다. 즉슨 남의 토지에 얽매여 사는 소작인 혹은 목숨을 내어놓고 살아야 되는 병졸로 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당시 양극화의 정도는 아우구스투스 시대 300만이 넘는 최고의 대도시인 로마 巿의 인구 중 무려 67만 명이 곡물배급을 받으며 생계를 이어갔다는 것에서도[1] 충분히 알 수 있다. 엄격한 기준에서의 대장원경영은 거의 이탈리아에 한정되었지만 2세기까지 로마의 동부와 서부에도 토지양극화가 꾸준히 확산되었다.[2] 기득권 계층의 수입은 거의 전적으로 지대였고 토지소유는 ‘아름다움(pulchritudo iungendi)’으로 일컬어질 정도였으며, 현재 지주가 아니더라도 그들 중 대다수의 꿈은 지주가 되는 것이었다.[3]


곡물을 배급받고 있는 인민들을 그려낸 고대 벽화.


우리 현대인들의 꿈과 다를 바 없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실시하였던 토지법제사적으로 정책 중에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첫째 독신세정책, 둘째로 이에 연장선이나 마찬가지인 출산장려정책이 있다. 독신세는 독신 25~60세 남성 모두에 해당하고, 일정 재산을 가진 20~50세 여성에게 해당되었다. 남성에게는 사회경제적인 패널티가 더 주어졌는데, 30세가 넘어가면 선거권이, 50세가 넘어가면 부모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이 박탈되었다. 공직 참여에 있어서도 같은 조건을 가진 기혼자보다 불리했음은 당연하다. 


독신세 정책의 표면적 목적은 인구증가이지만, 남성은 군복무를 하고 오면 직접세가 면세이기에 일단 남성에 대해서만큼은 군 복무율을 높이기 위함이 제 1의 목적인 것은 거의 명백하다. 더불어 독신에서 벗어나 결혼을 하면 대개 자연스레 자녀를 낳게 되는데, 이는 훗날에 국가의 군인의 수를 늘려주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오래 전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대부분의 폴리스들도 독신자들에게 사회적 패널티를 부과했는데,[4] 필자가 조심스레 추측하는 바 그 목적은 위처럼 국방력 강화를 궁극적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로마의 독신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독신세와 출산장려정책은 문자 그래도 순수하게 인구증가가 목적이었을까? 다음의 사건을 살펴보면 출산률 상승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출산장려정책의 시행 이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벌인 경로 잔치에 어느 노인이 초대되었는데, 그 노인은 자식 8명, 손자 35명, 증손자 18명을 동반하였다. 황제는 그 노인을 두고 로마 시민의 귀감이 되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 로마 시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하였다. 


오늘날 이탈리아 로마에 세워져 있는 '아우구스투스 동상'(ladacanon/iStock.com.)


흥미로운 점은 그 노인의 후손들 중 여성은 초대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설령 초대되었다고 해도 역사 기록과 아우구스투스는 그다지 여성들에게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의아한 부분은, 7백년 전 로마 건국 초에는 여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길을 비켜주고, 언어추행을 해선 안되며, 나체를 보여주어선 안되었고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살인죄가 적용되었을 정도로,[5] 동시대 다른 문명권에 비해 여성의 권익을 높게 보장하던 로마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출산장려정책 또한 사실상 ‘남아’의 출생율을 높여 훗날 국방력의 강화를 위한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토지법제사적 관점으로 배경을 고려하여 두 정책을 해석해 보자면, 제 3차 포에니 전쟁 이후 약 150년 간 제국의 영토 팽창이 눈에 띄게 감소하면서도 토지양극화가 심해짐에 따라 자유인 남성들의 (토지)자산 수준이 형편 없어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군 복무율을 높여 국방력이 약화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이 주장을 강화하는 또 다른 사건은, 아우구스투스가 군역을 이행하지 않는 이들 또한 직접세 면세의 혜택을 누리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판단을 하여 ‘만기 제대 군인을 위한 퇴직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속세(약 5%)를 납부하게 한 사건이다. 


즉 로마 남성이 결혼을 하여 독신세는 피했지만 군역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국방에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세금을 면제받기에, 이러한 이들에 대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5%의 상속세를 매김으로써 강제적으로 국방에 재정적인 측면에서라도 기여를 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위 세 정책의 공통적 목적은 국방력 강화였고, 그 목적이 설정된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심각한 토지양극화의 진행과 군역토사상의 퇴색으로 인한 군 복무율 저하 때문이었다. 


토지법제사적 관점으로 포괄적으로 분석해보자면, 본래 지주들이 감당해야 할 군역이 선택사항이 됨에 따라 국력이 약해지자,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한 위와 같은 사회적 비용이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여성들도 손해였다. 본래 거의 부유한 남성 지주들만이 부담해야 할 군역이 자신의 가난한 남편에게도 전가되었기 때문에, 남편이 군대 간 사이에 가계부담이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14년에 사망하면서, 유언으로 더이상 제국의 영토를 넓히지 말라고 말을 남겼다. 노예 공급도 크게 줄어든 상태인데다가, 이에 더불어 그의 유언은 제국의 영토 확장과 노예 공급의 마지노선을 거의 확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로마 제정기는 비교 불가할 정도의 부유층과 빈곤 농민들의 갈등과 긴장을 예고하였는데,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제 중인 서기 33년에 부동산 거품 붕괴와 채무불이행(default)으로 촉발된 로마사 최초의 금융위기였다.


촉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앞서 말한 바대로 원로원 의원들은 대놓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숨죽이고 토지 투기와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속주에서 의원이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음이 적발되어 고발당했다. 당연히 그동안 그들에게 공급되었던 불법적 신용 및 대부가 크게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평민 측의 호민관들은 율리우스법을 제정하여(원로원을 견제하려 했던 황제의 입김을 받았으리라 추측됨) 이자율 상한을 5%로 제한하고 의원들이 고리대금업과 토지임대에 관련된 법망을 피해갈 수 없도록 조치하자 자연스레 의원 등의 토지 가격은 급락했다. 즉 부동산 거품이 붕괴된 것이다. 


대출금을 갚으려 본인의 토지를 매각하려는 지주들, 그리고 채무불이행 상태를 이겨내지 못하여 여기저기 파산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더불어 33년 이전부터 발생해왔던 흉작으로 영세농과 중토지 지주들은 진작에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을 수 없는 경제적 위기에 처해있었다.[6] 


원로원의 힘이 약해지길 원했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바라던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그조차 로마 경제 전체가 휘청거릴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적 자금 1억 세스테르티우스(현재 가치로 약 20억 달러)를 3년 무이자 대출로 투입시켰고, 원로원은 묘책을 고안하여 채권자들이 채권액의 2/3를 이탈리아 부동산에 투자하면 그만큼 채무자들이 채무를 상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채권자들은 전액 현금 상환을 요구하였다.[7] 바보가 아닌 이상 깡통이 되버린 부동산을 원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채무자들은 위 법의 혜택을 보기 위해 앞다투어 부동산 시장에 매물을 놓았으나 이는 부동산 가격의 하락을 더 크게 즉 거품의 붕괴를 더 크게 촉진하는 꼴일 뿐이었고 완전히 채무 청산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고리 대금업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8]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거대한 은행들도 파산했다.[9] 경제위기의 규모만 다를 뿐 이 사건은 약 2000년 후 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모종의 경제위기의 원인과 과정, 결과가 거의 완벽히 동일하다. 심지어 잘못된 후속 조치를 취한 정부의 실책까지 말이다. 본서에서 위 로마 금융위기가 중요한 이유는, 토지사상 및 토지제도와 부동산 버블 붕괴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내용은 다음 글에서 이어진다.


 References


[1] 김진경, 김봉철, 최자영, 백경옥, 송문현, 오흥식, 차전환, 김경현, 신미숙, 최혜영,『서양고대사강의』(한울아카데미, 2008), 363~364쪽.

[2] 상게서, 355, 369쪽.

[3] 상게서, 346쪽.

[4] A. R. W. Harrision, THE LAW OF ATHENS: The Family and Property(OXFORD UNIVERSITY PRESS, 1968), pp. 19~20.

[5] Plutarch/이성규 옮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I』(현대지성사, 2000), 75쪽. 원문에서는 Plutarch, Romulus.

[6] Publius Cornelius Tacitus, Annals, book 6; 임웅, “문헌사료를 통해서 본 로마의 colonus”, 「사총」55(2002), 312쪽에서 재인용.

[7] “The Financial Crisis. Then and Now: Ancient Rome and 2008 CE”, EPICENTER, last modified Dec 10, 2018, accessed Feb 13, 2021, https://epicenter.wcfia.harvard.edu/blog/financial-crisis-then-and-now.

[8] 상게서.

[9] “Tiberius Used Quantitive Easing To Solve The Financial Crisis Of 33 AD”, BUSINESS INSIDER, last modified Oct 26, 2013, accessed Feb 13, 2021, https://www.businessinsider.com/qe-in-the-financial-crisis-of-33-ad-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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