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할 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위해
노란 꽃의 줄기를 싹둑 잘라냈다. 한 송이, 두 송이. 날카롭고 예리한 가위질 소리에 시든 꽃송이를 매달고 있는 옛 줄기가 바닥으로 툭- 뚝- 떨어져 내렸다.
가위를 집어 들기 전 한참을 고민했다. 시들기는 했지만, 아직 노란 빛을 띠고 있는 꽃송이를 자르는 게 옳을까. 활짝 핀 꽃과 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더 함께 하고픈 바람이었다.
그런데 우려스러웠다. 아쉬운 마음에 하루 이틀 미루다가 제때 꽃송이를 잘라내지 않으면 아직 봉오리 상태로 매달려 있는, 여린 꽃잎 하나 세상에 내밀지 못한 아기 꽃봉오리들이 만개할 확률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줄기에서 떨어지는 꽃송이를 애도하듯,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외며 시들어서 이제는 옛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꽃송이들을 잘라냈다. 어쩔 수 없다고 위로했다.
새롭게 피어날 준비 중인 어린 꽃송이들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어.
비단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이, 그리고 떠나야 할 시기가 있는 것이 내가 잘라낸 꽃송이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나이로는 아직 한창인 젊은 운동선수도 언젠가는 은퇴를 결정하고, 새끼를 기르느라 온갖 애정과 신경을 쏟아부은 어미 호랑이는 때가 되면 새끼들을 쫓아내거나 홀연히 떠나버린다.
떠나는 것은 자연의 순리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떠나게 될 순간이 있음이 조금 슬프다. 그것이 내 선택이 아닌, 가위질에 싹둑 잘려 나간 꽃송이가 맞이한 떠남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만약 떠나야 하는 순간이 나에게 찾아온다면, 내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존재들에게 축복의 말을 건네며,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을까. 그 어떤 미련이나 원망도 없이 웃음 핀 얼굴로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을까.
드라마 〈산후조리원〉에서 본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주인공 A는 여성인데다 젊다는 핸디캡을 뛰어넘고 임원직에 올랐을 정도로 업무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생명을 출산하느라 출산휴가에 들어간다. A는 출산 이후 업무처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육아에 대한 어려움, 복직하고 싶다는 미련에 이중고를 겪는다.
육아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자신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받고 싶었고, 그런 마음에 회사의 중요한 미팅 자리에 참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일은 이미 자신을 대신해 발령받은 다른 임원이 멋지게 해결해놓은 상태다. 그렇게 A는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회사의 모습을 보며 또 한번 좌절감을 맛본다.
꽃송이를 잘라내면서 드라마 내용이 떠오르고, 드라마 내용이 떠오르니 매일 퇴근 시간만 되면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 나와 회사에 몸담은 남편.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쩌면 우리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것이지만, 언젠가는 세월이 준 노련함보다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신선함이 필요한 시기가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떠나야 할 것이다.
아마도 회사원이라면 60세 된 이후부터는 자신의 아슬아슬한 처지를 조금씩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닌, 회사가 혹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칙이니까.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다. 대중의 선택을 받든 안 받는 내가 원하면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라고 싹둑 잘리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또 이 일이 좋은 이유 하나가 추가되고, 남편의 녹초가 된 어깨가 더 처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 하나가 추가된다.
이것은 안도였을까, 위로였을까. 어쩌면 안도였을지 모르겠다. 떠나야 할 때를 맞이하기 싫은 미련이 빚어낸 안도.
며칠 뒤, 결국 먼저 핀 꽃송이가 떠난 자리는 새로 핀 노란 꽃송이들로 채워졌다. 그 어느 때보다 크고 풍성한 노란 꽃들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 덕분에 또다시 노란 꽃을 바라보고, 더 오래 노란 꽃을 즐겼다.
그래.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것이 마냥 슬픈 일만은 아니라면, 나도 언젠가 가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떠나보자.
그렇게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어도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이 찾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