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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Mar 28. 2023

무명 작가의 감정 - 부러움

마감일이 부러운 누군가의 고백

  

나는 ‘마감’이 부러운 사람이었어요.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는 순간의 나는 누군가에게 마감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고, 샐쭉해진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이 감정을 더 오래 끌고 싶지 않았고, 그러려면 이즈음에서 털어내야 했거든요.     


마감이 부럽다니 무슨 말일까 싶겠지요. 자세히 설명하자면 마감일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쓰는 누군가를 부러워했던 겁니다. 마감일이 있다는 건 내 글을 내보일 약속된 곳이 있다는 거니까요. 매일 글을 써도 이 글이 언제쯤 활자로 인쇄되어 세상에 나올지 모르는 상태. 이런 상태에 놓인 글들은 하나둘 쌓이는데, 누군가의 글은 쌓일 새 없이 세상에 나와 독자를 만나고, 또 어떤 글은 몇 년 후에 세상에 나오기로 운명처럼 약속되어 있다니. 너무 부러운 일 아닌가요?     


물론 나에게도 마감일은 있었지요. 하지만 그건 어떤 사회적 약속이나 계약에 의한 게 아니었습니다. 단지 내가 스스로 정한 약속에 불과한 것이었지요. 마감일을 정해 초고를 쓰고, 마감일을 정해 퇴고하고, 마감일을 정해 투고하고. 뭐, 이런 식으로요. 스스로 정한 마감일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동안, 누군가는 다른 의미의 마감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니. 빈약한 경험은 마음의 번뇌를 불러옵니다.

한바탕 번뇌 속을 헤매다 보니 짜증이 나더라고요. 누군가는 마감일을 지키지 못해 조금 더 말미를 달라고 했다며 고백하고, 누군가는 마감일에 쫓겨 글 쓰는 게 힘들다고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마감일에 허덕이며 글 쓰느라 글 쓰는 일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다 하는데, 그럴 거면, 그러니까 마감일을 지키지도 못하고 마감일에 압박받아 힘들어하고, 글쓰기의 의미조차 잃어버릴 거면 왜 글을 쓰겠다고 약속했을까. 지키지도, 감당하지도 못할 약속을 해놓고 마감일을 늦춰달라고 하는 건 무책임한 처사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며 마감일 앞에서 고뇌하고 괴로워 할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걸까요? 누가 마감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고, 마감 유무에 영향받을 관계자도 아닌데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난다면, 이 화는 부러움 때문에 생긴 거라고 규정해봅니다.     


부럽다고 인정하고 나니 문득 저에게 묻게 됩니다. “너는 부러워할 자격이 있니?” 꽤 냉정하고 분석적이고 그래서 조금 재수 없는 자아의 물음입니다.

내 감정 내가 느끼는데 자격 운운하는 게 서운하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을 외면할 수 없어서 자아의 물음을 가만히 곱씹어 봅니다.     


저만 그런 거 아닐 거라고 믿으며 하나 더 고백하자면, 잘나가는 누군가를 보면 대단하다, 부럽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이 말을 들은 누군가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러게, 네가 부족한 게 없는데.”     

이 말은 위로였을까요? 물론 그렇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어요. 부끄러워져서는 얼굴이 붉어졌죠. 소위 성공한 누군가가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인내의 시간을 버텼는지, 얼마나 고단한 노력의 시간을 보냈는지, 그런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냥 부러워만 하면 그들이 보낸 과거를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한 프로그램에서 피겨스케이팅으로 세계 정상에 오른 김연아 선수의 연습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손흥민 선수가 연습하는 모습도 보았고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저는 이미 저보다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글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들도 저들처럼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두려워도 실패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겠지요.      


글을 꾸준히 쓰며 글쓰기를 놓지 않는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그들처럼 부단히 노력하는 시간을 보냈니?” 라고요. 부러워하기 전에 이 물음 앞에서 스스로 당당해질 수 있는지 돌아봅니다. 천부적인 재능이나 운 같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하고 스스로 떳떳해질 수 있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훗날 미련도 후회도 없앨 수 있는 정도의 노력을 먼저 했는지를 말입니다. 마음이 간절하다고 유명해지거나 나이가 많다고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간절함, 나이 같은 게 성공의 밑바탕이 될 순 없으니, 그렇다면 마냥 부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요.


결국 내가 아직 그런 시간들을 덜 보냈으니, 나도 그런 시간을 견뎌낸다면 언젠가는 나도 저 앞에 있을 순간이 올 거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믿으며 불쑥 솟아난 부러움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온갖 감정과 생각을 이겨낸 시간들을 누적하다 보면 저도 언젠가는 마감일을 고려해야 하는 작가가 되어 있을 거라는 꿈도 꿔봅니다.     

    

자, 그럼 그럴 순간이 찾아오게끔 만들기 위해 저는 계속 글을 쓰겠습니다. 결국 이래도 쓰고, 저래도 써야 하는, 쓰는 것을 선택한 자의 결론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그러나 이 단조로움은 또 얼마나 다행인지.


쓰다 보면 또 무언가가 부러워질 때가 오겠지요. 그때도 지금처럼 부러움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건강한 방식으로 이겨낼 수 있음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여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 부러움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건전한 방식으로 이겨내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이 분명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보내줄 테니까요.


아직 ‘부러워하는 자’의 역할을 수행 중인 모든 초행자의 하루에 행운이 깃들길 바라며, 이만 총총.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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