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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Apr 11. 2023

쓰는 이유

글은 헐거운 운명의 고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포기할 수도, 그만둘 수도 없어서 여태 글을 쓰고 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그러니까 존재 이유가 내가 아닌 부모의 인정에서 비롯됐을 때 글쓰기는 내가 원하는 달콤한 보상을 가져다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글을 쓰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았고 상을 탔으며 상장을 들고 집에 가면 칭찬과 용돈을 받았다. 활짝 웃으며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밝은 표정도 따라왔다.


“‘한번은 상패를 받고 와서는 엄마 빨리 나와봐, 이거 너무 무거워.’하더라니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을 때, 어린 나에게 글이 어떤 존재였는지가 더 선명해졌다. 맹랑하고 딱하게 글을 이용하며, 글을 쓰면 생기는 좋은 일들의 선순환을 바랐다. 그게 글을 쓰는 이유였다.     


글쓰기만은 아닌데, 만들기도 있고 그리기도 있는데, 왜 하필 선순환의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했을까. 어쩌면 그 배경에는, 나아가 아직까지도 글을 쓰며 사는 이유에는 내 영혼에 글과 관련된 씨앗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DNA가 있고 그 속에 담긴 정보가 다르듯, 나에겐 책과 글에 관련된 성향이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재능이라기보단 성향의 씨앗. 씨앗은 운 좋게도 썩지 않고 싹을 틔워 무럭무럭 자랐다. 덕분에 나는 은행이 은행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인생은 결국 글 쓰는 자로 살아갈 운명인 듯 흘러왔다. 그러나 글쓰기가 나의 운명이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운명인 듯 귀결되었으나 그것은 알칼리 토양에서는 붉게 자라고, 산성의 토양에서는 파랗게 자라는 수국처럼 언제든 변할 가능성이 있는, 헐거운 운명의 고리였다. 결국 그 헐거운 운명의 고리 속에서 나는 얽매이고 말았지만.     



책이 좋아서 글과 가까워진 건지, 글을 쓰다 보니 책이 더 좋아진 건지 모르겠지만, 금방 지겹고 흥미가 떨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지루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기쁨이었던 유일한 것은 책이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텅 빈 집에 혼자 있을 때, 애니메이션 ‘웨딩피치’ 말고 나와 놀아준 것 역시 책이었다.

책을 읽고, 심심하면 책으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자다가, 책이 만들어준 유·무형의 세상을 허물어뜨리고 다시 책을 읽으며 나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세우고 허물어뜨리고 다시 세우는 반복의 시간을 책은 묵묵히 함께해줬다.      



  

책을 읽다 보면 어떤 꿈을 꾸는 시기가 온다. 너무 사랑해서 하나가 되고 싶은 순간, 그 순간에 언젠가 나도 책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내가 읽은 수많은 책의 작가들은 어떻게 책을 쓰게 되었을까. 어떤 사람이 책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훌륭한 사람이 돼서 책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땐 책이라는 건 훌륭한 사람만 쓰는 건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훌륭해서 책을 쓰는 게 아니라 책을 쓴 그 행위 자체가 대단하고 훌륭한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   

  

내 삶에 꿈과 미래의 중요성이 커질 무렵에는 좋은 일들의 선순환이, 그러나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은 그 이상의 선순환이 나에게만이 아닌 타인에게도 일어나길 바라며 글을 썼다. 글을 써서 누군가를 돕고 싶다. 이게 글을 쓰는 이유였다.

외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라는, 가난한 사람도 살만한 세상이 되게 해달라는, 부정을 저지른 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이런 글을 쓰며 온갖 사각에 놓인 사람들의 확성기가 되어 그들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글은 그럴싸한 수단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수단 취급당하는 게 불쾌해서 글이 협조하지 않았으려나. 여하튼 마음은 컸으나 현실의 벽은 그보다 더 크고 높았다. 글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인생을 살만큼 삶은 쉽지 않았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글은 점점 멀어졌다.     


한동안 책을 덮고 펜도 내려놓고 살다가 다시 글을 만났다. 역설적이게도 삶이 괴팍하고 팍팍해서 몸과 마음이 소진되었을 때, 그때의 나를 일으켜 세운 건 글이고 책이었다. 글과 책만으로 세상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책과 글 없이 세상을 사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그제야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줄 알았던 글이 내게 어떻게 힘이 되었는지를 깨달았다. 


글을 쓰며 비로소 진짜 내가 됐다. 내 감정을 마주하고 인정하는 것, 내 생각의 틀을 깨닫고 깨부수는 것, 원망과 미움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화해하는 것, 낯선 지금의 나를 인정하는 것, 그러나 조금은 달라질 미래를 꿈꾸는 것. 이 모든 것이 글을 쓰며 가능했다. 살면서 꾸역꾸역 차려입은 온갖 격식과 예의와 바람직함의 허물을 벗어내고 고유한 나를 찾는 여정. 그 길에 글쓰기와 책은 좋은 동반자이자 방법이었다.     




고백하자면 글쓰기의 시작은 개인적인 이유가 전부였고, 다시 글로 돌아온 이유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전부였다. 나다운 내가 되기 위해, 영혼이 성숙하기 위해, 인생이 삶다워지기 위해. 이런 개인적인 이유들말이다.

글을 쓴 덕분에 마음이 가시가 조금만 박힌(예전에는 많이 박혀 있었다) 솜털 같아졌고, 일상이 무채색에서 화려한 색들로 꾸며졌다. 글로 인해 얻은 힘과 안락함 속에 이르렀을 때, 다른 무언가를 바랐다. 나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글이 내게 힘이 됐듯 누군가도 힘을 얻게 해달라고, 글을 쓰며 삶이 피어났듯 누군가의 주름도 반듯이 펴지게 해달라고. 내가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고 희열을 느끼듯 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감정의 파동이 되길 바랐고, 염치없게도 아직 그런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글은 양면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없이 자상하면서 한없이 무자비한 얼굴. 그 양면의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쓰고 읽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글이 뜻대로 써지지 않아서, 글이 선명한 안락이 되지 않아서 가끔 웃고 종종 걱정한다. 

마음이 솜털 같아지고 미래를 꿈꾸게 되고 글을 쓰는 지금이라는 현실이란 역시나 시험의 연속이고, 언제 나아질지 모르는 미궁의 상태다. 글을 써서 버는 돈이라야 책 값하기도 부족하니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걱정이 종종 찾아온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버티면 나아질까 하는 불안감, 점점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예전까지 않은 건강, 사람들이 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과 이대로 안주하면 안 된다는 조바심까지. 이런저런 소란함에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만둘까 하는 물음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물음에 익사하기 전 나를 구해 올려준 답은 또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역사학자 토인비는 도전에 응전하지 못한 역사는 쇠락하고 만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도태되지 않기 위해, 인생의 뒤안길로 물러나거나 삶의 시류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도전하고, 성취하고, 도전받고 응전하며 좌절하고 극복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통을 즐기는 변태 같은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이 고통을 극복하고 나면 한층 더 글쓰기에 어울리는 내가 되어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쓰는 삶이 녹록지 않아도 쓰지 않은 삶이 더 험난했다는 경험 때문에 내 삶은 이미 글쓰기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을 생생하게 살아갈 방법이 글쓰기이고, 안녕을 위해 나를 돌봐준 것 역시 글쓰기이기 때문에.      


나는 잘살고 싶고, 더 잘 살고 싶어서 어제도 글을 썼고 오늘도 글을 쓴다. 그리고 내일도 글을 쓸 것이다. 쓰는 삶이 소명이지는 않더라도 쓰는 삶을 내가 찾은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이미지 출처: Dmitriy Gutarev,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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