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기적, 바라지 않는 마음

by 임경미


어쩌다 인생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때가 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내게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여행지에서 보트 사고가 났지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했던 때, 눈길에 차가 두세 바퀴 돌았지만 사고가 나지 않았던 때, 덤프트럭이 달려오는 걸 알아차리고 번개처럼 뛰어 간신히 트럭을 피했던 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다행이다 싶은 기적 같은 일들 덕분에 나는 이렇게 무사히 살고 있다. 어디까지나 만약이지만, 그때 보트의 다른 좌석에 앉았다면, 눈길에 차들이 서행하지 않았다면, 덤프트럭이 달려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참 다행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내게 찾아온 기적이라는 것들은 기쁨보다는 안도 같은 것, 행복보다는 다행인 것, 좋아서 방방 날뛰게 되는 게 아니라 한시름 놓았다며 주저앉게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욕심이 과한 탓일까. 가끔은 그동안 겪었던 종류의 기적이 아닌 다른 종류의 기적이 내게도 찾아왔으면 좋겠다. 기적이라는 게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첫 책이 나오기 전 한참을 설레며 지냈다. 초심자의 운 같은 것이 내게도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열심히 쓴 책이니 큰 빛을 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설레면서. 그때의 나는 기적이 기적처럼 일어나길 꿈꿨고, 김칫국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런데 현실은 역시나 현실적이었다. 기적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런 현실을 쏙 빼닮은 현실을 마주했을 때 확률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실감했다.

기적 같은 스토리는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지만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컸고, 그래서 기적 같은 스토리는 여전히 기적인 채로 내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평범하게 첫 번째 책을 출간했고, 그럴수록 더 또렷하게 현실이라는 녀석이 어떤지를 각인했다.


하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기적이 내게 찾아오지 않은 것에 실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자책하지 않았다. 기적이라는 것이 그런 거니까. 흔하지 않아서 귀하고, 귀해서 더 흔히 올 수 없는. 그리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기적이라는 말 자체가 상식에서 벗어난 기이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적을 믿지 말아야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여전히 기적을 믿고 앞으로도 기적을 믿고 싶다. 그것은 내게 희망이고 오늘을 설레게 만들어주는 하나이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항아리 이야기. 판도라가 절대 열면 안 된다는 말을 어기고 항아리의 뚜껑을 열었을 때, 그 항아리 안에 담겨 있던 온갖 재앙이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워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항아리의 맨 마지막에 담겨 있었던 것은 바로 희망이어서 인간이 온갖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희망을 품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애당초 온갖 재앙이 담긴 항아리에 왜 희망이 들어있었을까. 어떤 사람은 희망이 재앙들과 함께 담겨 있었기 때문에 희망 역시 재앙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온갖 재앙들을 겪어낼 수 있는 힘은 희망이기에 함께 담겨 있는 것이라고 했다. 희망이 신의 벌일지, 신의 아량일지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희망은 우리에게 왔다.


희망은 저주일까, 축복일까. 무엇이 더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희망만을 좇으며 전전긍긍하는 사람에게 희망은 벌이자 저주일 것이고, 희망을 믿되 좌지우지되지만 않는다면 그런 사람에게 희망은 신의 아량이자 축복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판도라의 항아리 속에 담긴 희망을 신의 벌이자 저주가 아닌, 신의 아량이자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내게 기적이 찾아오는 건 어려운 일이고, 경우의 수가 많은 확률 게임에서 단 하나의 1이 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지만, 희망을 품고 기적을 바라는 삶은 그보다는 쉽고, 유용하다. 그래서 나는 기적을 믿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제발 그런 일이 내게 생기게 해달라며 전전긍긍하며 빌지는 않을 것이다.

베스트 셀러가 되기는 어렵지만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다는 기적을 믿을 것이고, 멋진 소설을 쓰는 것은 어렵지만 그럼에도 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것이며, 마음 맞는 사람을 사귀기는 일이 어려워도 그런 사람이 주변에 한둘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살 것이다. 그 가슴 부풀어지게 만드는 무언가를 안고 하늘을 둥둥 떠가는 느낌.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며 달려보는 거다.


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일이란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지만, 그렇다고 기적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사전을 가지고 살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이미 ‘일(1)’을 선점당한 기적은 이제 내게 일어날 확률이 요원해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나만의 일을 만들어가며 나만의 기적 스토리를 쓰면 된다. 끝내 그건 참, 기적 같은 일이었다는 말을 할 날이 분명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사진 출처: Pixabay, Steven Weir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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