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히어로가 아니다

by 임경미


히어로 영화를 보면 즐겁다. 기가 찰 정도로 사악한 악당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존재를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버리는 그 결말이 좋다.

그들이 쫄쫄이 타이즈를 입던, 거추장스러운 무기를 들던 상관 없이,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쳐서 ‘그래서 마침내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하는 결말은 해피엔딩이라서 더더욱 즐겁다.

아주 어린 꼬마 임경미는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을 꿈꿨다. 오지랖과 의협심 사이에서 줄 타는 아이, 그런 아이가 나였다. 그런데 아직 그 습관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이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점점 또 다른 종류의 히어로가 되어 간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부모든, 자식이든 어떤 위치에 있든지 막중한 책임 의식을 지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슈퍼맨이라도 되는 양, 내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사는 것이다. 굳이 내가 나서도 되지 않을 일을 자청하며 일을 떠맡고, 일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드라마 〈산후조리원〉을 보면 유명 대기업 이사로 일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녀는 국내 대기업 최연소 여성 이사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거머준 뒤 얼마 되지 않아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선물 같이 찾아온 아이었지만, 원치 않은 타이밍이었다. 그녀는 출산 휴가에 들어가지 않고 양수가 터질 때까지 일하며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킨다.


출산 후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회사직원에게 연락이 온다. “곧 중요한 발표가 있는데 이사님이 안 계시니 걱정돼요.” 직원의 하소연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출산 후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 혼란에 빠진 그녀였기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결국 그녀는 발표날 외출을 감행하고 회사에 찾아갔다. 직원들에게 히어로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그러나 동료들은 자신이 없어도 자기 일을 해내고 있었고, 그녀가 도와주려고 했던 발표도 후임 직원이 무사히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게 어디 허탈감뿐이겠냐는 말이다. 속상하고, 나는 이제 없어도 되는 존재가 된 것 같고, 분하고, 슬프고. 내 자존심과 마음을 갉아먹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안 좋은 감정들만 솟아올랐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내가 아니면 안돼. 내가 하지 않으면 안돼. 내가 없으면 안돼’ 같은 생각에 빠져 나를 닦달하고 몰아세우고 애쓰기를 반복했었다. 그러나 책임 의식과 의협심 수준을 넘어서서 나의 한계치를 모르고 덤비는 수준이라면 병이다. 일명 히어로 병.

그것뿐이 아니었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말은 “이런 것까지 내가 해줘야 돼?”하면서도 내심 나를 찾아주는 그가 반가웠다. 그야말로 이중성 가득한 히어로 병에 걸린 환자였다.



어느 날, 이런저런 모임으로 귀가가 늦어진 적이 있었다. 밥은 먹었을지, 집은 제 모양일지 걱정되는 마음에 서둘러 집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내가 없는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잘 보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물들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밥은 해 먹었고, 설거지도 해뒀고, 그래도 시간이 남아 혼자 외출해서 청바지도 하나 구입했다며 자랑하는 남편. 새로 산 바지가 어떤지 봐달라며 패션쇼를 하는 남편이 미웠다.


항상 “자기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라는 말로 걱정을 했었는데, 내가 없어도 혼자 밥 잘 먹고, 쇼핑까지 하는 남편을 보니 서운한 마음이 든 것이다.

남편에게는 벌써 내가 없어도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내 역할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바지 너무 촌스러워”라고 거짓말을 했었더랬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성질을 부리고 나니 ‘아차’ 싶었다. 드라마도 그렇고 현실도 그렇고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고, 세상도 잘 돌아가고, 가족도 잘 살텐데, ‘나는 아직도 히어로 병에서 완쾌되지 못했구나’ 싶었다.

그것은 나의 자만이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하고, 다 할 수 있고, 다 도와줘야 한다는 자만. 그렇게 할 필요도 없고, 어떤 일은 그렇게 할 수 없음에도 나의 한계를 한계치까지 몰아세우며 떠맡으려고 하는 자만. 그런 자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자.

하지만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에 필요 없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라는 것.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기 때문에 모든 일에 내가 무리하게 나설 필요가 없다는, 내게 이로운 생각만 쏙쏙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 히어로 병을 고쳐보자.

그러면 남편이 쇼핑하는 길을 억지로 동행하지 않아도 되고, 출산 후 몸을 푸는 와중에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히어로는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영화 속에 존재할 때가 가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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