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의 강박 떨쳐버리기
잘하고 싶은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공부를 잘하고 싶고, 돈을 잘 벌고 싶고, 글을 잘 쓰고 싶고, 노래도 잘 부르고 싶고, 옷을 잘 입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잘 먹고 싶고, 잘 생기고 싶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고, 게임마저도 잘하고 싶다.
‘잘’의 의미가 미묘하게 다르지만, ‘잘’을 붙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쓰다 보니 잘하고 싶은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 아닌, 잘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의 속성을 마주한 느낌이다.
‘잘’ 하는 것은 무엇일까? 완벽한 것? 남들보다 뛰어난 것? 아니면 내가 만족하는 정도?
어느 기준을 이용해 ‘잘’ 하는 것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고 해도 사실 답은 없다. ‘잘’의 잣대가 일정하지 않으니까.
완벽하다는 것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비교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며, 내가 만족하는 것 역시 그날의 상태에 영향을 받아 일관성이 떨어지니 말이다.
‘잘’. 익숙하고 능란하게, 옳고 바르게, 좋고 훌륭하게 라고 정의된 이 단어가 있어 참 아쉽다. ‘잘’만 없었으면 그저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낼 수 있었을 것을. ‘잘’이 있는 세상에 태어나 괴롭기 짝이 없다. 여하튼 ‘잘’이라는 단어 때문에, 나처럼 욕심 많은 수많은 영혼이 괴롭다.
볼링에 익숙하지도, 능란하지도 않은 내가 팀 대항전 선수(?)로 나섰을 때의 일이다. 볼링을 좋아하는 남직원들은 월등히 실력이 좋은 사람을 제외하면 점수가 비슷하니, 팀의 승패는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된, 깍두기 마인드를 가진 여직원의 점수에 의해 결정됐다. 그런데 대강 던지고 들어오겠다는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출전한 내가 사고를 치고 말았다.
평소 또랑에 공이 빠지던 실력은 어디 가고, 그날따라 ‘핀 사이로 막 가’ 모드를 버리고, 볼링핀 추적 장치를 단 듯 완벽한 스페어 처리까지 해낸 것이다. 그리고 정점을 찍은 대망의 스트라이크. 그런데 스트라이크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다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팀원들의 압박 같은 응원이 이어졌다.
“이번에 잘 해야 돼. 점수가 더블이야!”
뭔 말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점수를 더 준다고 하니 잘해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라인 앞에 선 나는 또 한 번의 요행을 바라며 공을 굴렸다. ‘잘하자. 제발!’ 공에 강한 염원을 실어 담으며.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민망한 상황이 연출됐다. 볼이 일찌감치 또랑에 빠져 굴러가고 있던 것이다. 젠장, 잘해야 하는 타이밍에 이게 뭔 망신이란 말인가.
민망한 마음에 자리에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굴렸으면 4개는 쓰러졌을 볼링핀이, 힘을 잔뜩 넣은 볼링공 앞에서는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대로 했으면 적어도 4개, 운이 좋으면 6개도 쓰러트릴 수 있었는데, 잘하려고 지나치게 힘을 주는 바람에 될 수 있었던 것도 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
‘잘’ 하고 싶은 것들의 홍수 속에서 의문을 던져본다.
굳이, 왜, ‘잘’ 해야 하는 걸까. 인생이 전투도 아니고, 대회도 아니고, 올림픽도 아닌데 말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선수, 병사, 혹은 경쟁자 모드로만 살아가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가끔은 경쟁이나 전투 모드를 끄고 가벼운 마음으로 임할 수는 없는 것일까.
가끔은, 아니 가끔보다 더 많이 이걸 생각했으면 좋겠다.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는 것’이라는 것을. 하지도 못하면서 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하는 것마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만약 내가 지금 할 수 있냐, 없냐의 기로에 놓인 상황이라면 잘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어떨까.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페이스대로 하는 것이다. 평정심과 항상성을 잃는 순간 페이스를 잃게 될테니 말이다. 그렇게 하는 행위가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을 때 그때쯤 익숙해지고 능란해지는 실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목표를 상향조정 하면 된다.
그러니 뭐든 잘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 잘하는 나보다 하는 나를 인정해주면 언젠가는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잘하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