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빛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

by 임경미


내 첫 책을 읽은 친구가 속마음을 털어놨다.


“나는 네 두 번째 책부터는 읽지 못할 것 같아. 네가 아예 소설을 쓴다면 모를까.”


친구의 말에서 그녀가 느꼈을 쓰라림의 정도가 전해졌다. 내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한 내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이 힘들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친구의 말대로 나는 ‘발가벗은 느낌’으로 글을 썼다. 그저 아주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모든 걸 드러냈다. 글을 쓴 그 순간, 손이 가는 대로 가감없이, 거짓없이 썼다.

본의 아니게 친구는 그런 나를 목격했고, 가깝게 살았음에도 말하지 않았던 내 고통의 순간을 뒤늦게 마주해야 했다. 솔직하지 못했던 자의 뒤늦은 고백에 애먼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


그래, 네가 내 친구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독자였다면, ‘아, 이 사람은 그랬겠구나’ 싶었을 이야기에 너는 베이고 뜯기고 물린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눈을 가리고 싶어버렸을 만큼 보기 힘든 장면을 죽- 목격하라는 벌을 받는 느낌이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였을까. 친구의 말을 듣고 쉽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왜 내 이야기여야 할까? 왜 나의 상처여야 할까?

그것들이 아니면 나는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일까?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내 글과 스스로 마주한 넘어서야 하는 글이라는 허들과 친구의 독서평의 조화는 교묘히 어우러져 한목소리를 냈다.


이대로는 안돼. 경미야.

안된다고? 그래,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될까?

텅 빈 하얀 종이 위에 똥이 나오는 펜을 굴리며 한참을 쳐다봤다.


내가 왜 글을 썼더라? 글을 쓰자고 마음먹기 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도 생각의 틀에 갇혀 있었다. ‘내가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 물음표를 던졌었다.

아무런 업적도 없었고, 경력이라곤 회사생활이 전부였다. 반대로 커다란 시련을 이겨낸 영웅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울고 불며 평범하게만 살게 해달라며 빌었던 기도도 철딱서니 없는 자의 배부른 탄식으로 느껴졌다. 물음표라고 했지만, 이 객관적인 비유의 뒤에는 나에 대한 불신과 자격지심이 담겨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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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살고 있다. 젊은 시절 방황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해 글을 배웠고, 공부를 했고, 대학에 가기 위해 또 공부했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위해 살고 있다.

이 여자의 삶을 단순히 살고 있다고 서술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여자는 열심히,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여자의 이야기를 더 살펴볼까.

여자의 아이 중 한 명은 장애가 있었고, 여자의 아이 둘의 아빠는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 아이의 아빠는 여자의 양아빠였다.

여자의 엄마는 자신의 남자가 자신의 딸을 범할 때 자기가 더는 사랑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며 오히려 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여자는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치열하게 살길 선택했다. 그리고 여자의 독백.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변 사람들을 환히 비춰주는 밝은 빛이 난다. 하지만 그들도 원래는 어두운 터널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 터널 안에서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빛은 오직 자기 내면의 빛이었을 것이다. 그런 경험 때문에 그 터널에서 빠져나온 뒤 한참이 되어서도 그들은 여전히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빛을 나눠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 <프레셔스> 중에서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프레셔스> 포토


영화 <프레셔스>에 나온 한 여자의 삶.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듣고, 가슴이 아렸다. 이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려는 걸까.


여자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할 것이지만, 그녀처럼 나도 내 삶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길 바랐고, 나의 글이 수단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나는 결국 글을 썼다. 그때 긴 터널 속에 있던 나를 이끌어준 불빛이 아직 터널 속에서 헤매거나, 이제 새로운 터널 속에 들어온 누군가에게는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줄 불빛이 되길 바람으로 말이다.


기쁜 경험이든, 슬픈 경험이든, 고통뿐이라고 기억됐던 경험이든, 혹은 행복한 경험이든, 내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뭐 그리 중요할까.

지금 내가 그 이야기로 글을 쓸 수 있고, 그 글을 읽고 함께 울고 웃어줄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것 아닌가.

그래서 결국 다시 펜을 들어, 내 이야기를 한 주먹 끄집어내고, 네 이야기도, 쟤 이야기도 한 주먹씩 끄집어내어 다시 글을 쓴다.

이것을 마치 방황하지 말고 나아가라는, 글의 신이 주는 메시지인 양 믿으며.


(메인 사진 출처: 픽사베이의 피야퐁 사다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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