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쓰는 일상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이불에 발가락이 걸리기 시작했다. 발가락에 고통이 생길 때마다 이불에 시선이 갔지만, 도대체 왜 그러는지 원인을 찾을 수 없어서, 더 정확히 말하면 원인을 찾을 만큼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불에 발가락이 걸리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수롭거나 의미 있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신경 쓰고 살 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살아야 해?
언제부터였을까. 기억나지 않은 아주 오래전부터 신경 쓰는 삶을 살고 있다.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에서, 일에서, 그리고 나와의 관계에서.
혼자만 잘난 사람이 아니기에, 독불장군처럼 살 수는 없기에 이런저런 신경을 쓰며 살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을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나는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신경을 쓰고 있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 사람. 내가 가진 여러 이상향 중 하나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신경 쓰는 삶이란 많은 에너지는 요하는 꽤 피곤한 삶이다. 은연중에 피로가 쌓이고, 부지불식간에 부담이 쌓여서 문득 알아차렸을 땐 몸도, 마음도 묵직한 무언가에 눌려 있게 된다. 그래서 신경 쓰는 삶이 주는 피로함을 덜어내기 위해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정해두고 신경을 쓸 것과 신경을 조금만 써도 될 것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을 구분해놓고 살았다.
이불에 자꾸 발가락이 걸리는 문제는 신경 써야 하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새들한 영역의 것이고, 삶은 ‘대수로운 것’을 중심으로, 대수로운 것들을 위해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발가락이 자꾸 불편한 것쯤은 가벼운 문제로 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방치해 둔 이불이 점점 문제를 일으켰다. 어쩌다 발가락이 걸리는 것을 넘어, 어떤 날은 제대로 걸렸는지 발톱이 빠져 버릴 것처럼 아팠고, 어떤 날은 발가락이 반대로 꺾여 뼈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자꾸만 발가락을 괴롭히는 이불을 들여다봤다.
침대 매트리스 위에 얌전히 놓여있는 이불은, 천이 해지고 실밥이 풀려서 누빔이 터졌고, 이미 찢어진 천 조각은 돌돌 말려 안에 넣어 놓은 압축 솜을 밖으로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저 어딘가에 다듬지 않은 발톱이 걸리고 가끔은 운 좋게 발가락도 걸렸으리라.
이 이불을 언제쯤 샀을까. 글쎄, 한 오 년 전쯤.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이불을 침대 위에 깔 무렵 뜯어질 기미가 보였던 이불을 이미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계절에만 한 번 더 쓰고 내다 버릴 생각을 하며 침대 위에 깔았더랬다. 이불쯤이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대수롭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또 이불이 자꾸 밑으로 흘러내리는 것은 상관이 있고, 대수로운 일이어서, 밑으로 흘러내리지 말라고 이불의 모서리를 핀으로 꽃아 침대와 연결을 해두었다. 이불은 사지를 잡아당기는 팽팽함과 그 위를 축구장처럼 노니는 내가 만들어낸 마찰력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뜯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으리라.
이제는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진 이불. 닳고 해진 이불이 마지막 임무라도 부여받은 듯 자꾸 말을 거는 것 같다.
“공사다망하십니까.”
이불의 말에는, 도대체 뭐가 그리 바빠서 실밥 하나 자르지 않았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돌아보지도 않은 건지, 이불을 다듬고, 이불을 사러 갈 시간에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보면 매일 그런 일상들이었다. 대수로운 것이 중요한 일상, 대수로운 것이 우선되는 일상,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들, 해야 하는 것들이 가득했던 일상.
이런 일상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저울질하며 더 무겁고 더 중요한 것을 먼저 하느라 어떤 것들은 항상 뒤로 밀렸고, 결국 이불 손질하기 같은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해지고 너덜너덜해져서 완전히 망가져버릴 때까지.
용케 그 구분에서 신경 쓰는 것의 대접을 받는 것들이란, 주로 미래에 관한 것이다.
글 쓰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이후, 그 선택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조건처럼 따라붙고, 스스로 만들어낸 조건 속에서 나는, 원하는 삶을 사는 죄를 지은 죄인이었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형벌을 받은 죄인이었다.
한때의 축복을 지금의 저주로 받아들이는 일상이 반복됐다. 내 선택에 책임지기 위해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여기저기에 글을 올리고, 사람들과 가끔 안부를 나누고, 그리고 주어진 일을 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일상. 이런 일상을 반복하기 싫어서 무언가를 해야 했지만, 그 분주함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고,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었을까.
내가 만들어낸 루틴과 분주함 중 어느 것은 미래의 나를 위한 투자였고, 어떤 것은 미래의 나를 위한 기반이었으며, 어떤 것은 혹시나 하는 기대에서 비롯된 희생이었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 간격을 나눠놓고 보면 나의 루틴들은 현재보다 미래에 더 가깝게 놓여있는 것들이었다.
어느샌가 일상이 되어버린 루틴들로 인해 지금의 나는 양보하고 놓치는 것들이 있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누린 것의 가치는 오늘의 인내를 먹고 자라 미래에 꽃을 피우는 것이 대부분인 일상. 이런 일상은 자꾸 발가락을 괴롭히는 이불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게 만들었다. 발가락이 자꾸 이불에 걸려도 나는 지금 책을 읽을 것이고,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언젠가, 미래에 찾아올 영광을 위하여. 그것이 대수로운 것들을 그에 합당하게 대하는 일이니까.
그러느라 자꾸 뒤처진 것들이 있었다. 사람들과 연락하는 것, 건강을 돌보는 것, 일상을 다듬는 것. 이런 것들은 저울질과 순위 매김에서 자꾸 뒤로 밀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어쩌면 가장 기본적이어서 사소해 보이는 일들, 이런 것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특별한 일상을 위해, 조금 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는 것에 몰입하고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르페디엠.
오늘을 잡으라는 마음속에 신조는 어느덧 변질되어버렸다.
나는 지금 오늘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고 있을까.
오늘을 사는 삶과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사는 삶. 전자는 처음 내 마음속에 들어온 카르페디엠이었고, 후자는 그 사이 변질된, 죄인의 마음속에 간직한 카르페디엠이었다.
해지고 터진 이불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겨서 터져버린 내 마음이 보인다.
자꾸만 턱턱 걸려도 외면하고 알아주지 않아서 자꾸 발가락이 걸리듯,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꿈, 미래, 이상, 뭐 이런 대수롭고, 의미 있고, 중요해 보이는 단어들만 보지 말고, 지금을 조금 더 봐달라고 재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핑크빛 이상을 좇아가느라 바쁘더라도 조금 시간을 내어보는 것이 어떨까. 하루 5분, 10분, 그러다가 재미가 붙으면 1시간까지도. 나를 돌보고, 주변을 돌보고, 일상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내가 해야만 하는 걸, 꿈꾸는 것만 하며 사는 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인생이라는 시간은 다양한 시간들로 채워져야 한다. 잠시 쉬는 시간, 주변에 머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가만히 사색하는 시간, 몸을 움직이며 건강을 돌보는 시간, 쾌적한 환경을 위해 청소하는 시간 같은 다양함이 가득할 때, 그것이 진짜 카르페디엠을 실천하는 길이고, 새들한 것과 대수로운 것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주말에는 해진 이불을 내다 버리고 새 이불을 깔아야겠다고 약속했다.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새로운 것에 대한 만남이 주는 기쁨으로 치환하며 다시 하루에 생기를 불어넣어 보는 거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엄마, 예전에 홈쇼핑에서 샀다며 줬던 이불 기억나? 내 잠버릇이 어찌나 요란했던지 그게 해졌지 뭐야!
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다음에는 푸짐하게 차린 한 끼 식사를 먹어야지. 우유에 시리얼을 붓고, 과일도 씻어 놓고, 커피도 한 잔 타서 한 끼를 먹어야지. 그 다음에는 환기를 하고, 밤새 탁해진 공기가 맑아지길 바라며 지난밤 가득 쌓아놓은 이런저런 흔적들을 몰아내고, 묵은 먼지를 털어내야지.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흔들거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그리고 드디어 피기 시작한 개나리를 보며, 어떤 날은 물들기 시작한 단풍을 보며 그들과 놀아야지.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한바탕 놀아야지.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한 이후로 어느샌가 놓아버린 나의 소중한 일상들. 오늘은 그런 것들을 하며 하루를 보내야겠다. 때로는 글 쓰고 책 읽고 사유하는 삶만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까.
나의 일상에 오늘을 가져다 두는 거다. 지금만이 할 수 있고, 지금이기에 더 있는 일들을 찾아서.
자그마한 관심으로 일상이 더 편하고 반짝일 수 있도록, 새들한 것과 대수로운 것의 균형을 잡아보는 거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의 루디와 피터 스키테리안의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