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말 - 연연하는 마음

언어에 마음을 담는 일상에 대하여

by 임경미


언젠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지냈다.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몰라 계속 품고만 있었던 말.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배우고 있던 동안 조용히 마지막 호흡을 정리하신 아버지께 전할 수 없었던 마지막 말.

드리고 싶은 말이 많아서,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마지막 말은 줄곧 마지막이라는 딱지를 떼어내지 못한 채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이 무수한 말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어떤 말에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야 할까.


마음의 용량이 무한대라 믿었던 때엔 말 몇 마디 가슴에 품고 사는 게 견디지 못할 것도 아니었지만, 어떤 말은 유난히 무거워서 계속 두기엔 마음이 점점 벅차고, 공간마저 부족해져 비워내고 싶을 때가 찾아온다. 마음의 공간이 하드 디스크라면 어떤 말은 제법 공간을 잡아먹으며 있을 거라고, 아버지께 전하고 싶었던 말이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하지 못해 간직했던 말을 마무리 짓기로 한 건 아버지의 위패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다음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 되어가는 동안 매번 같은 모습으로 우릴 반겨주었던 아버지의 위패와 사진 한 장.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납골당 관계자가 만들어준 임시 위패. 그게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 건, 아버지와 아랫집, 윗집, 옆집에 거주하시는 분들의 위패가 하나둘 바뀌면서부터였다. 어디엔 단란한 가족사진이 놓여있고, 어디엔 고인의 멋졌던 모습이 사진으로나마 남아있는데, 여전히 임시로 만든 위패가 놓여있는 아버지의 작은 공간을 볼 때마다 불효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위패를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이참에 오랫동안 전하지 못해 마음에 담아뒀던 무수한 말들도 꺼낼 생각이었다. 마음의 오랜 짐을 벗어내야지. 말도 제법 무거우니까. 삶의 무게에 말의 무게까지 더하지는 말자. 어떤 말은 오랫동안 머물다 떠나길 마음먹는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게 이미 수년 전이었지만, 뭐가 그리 바빴는지 미루고 미뤘던 일을, 올해는 절대 넘기지 않으리라 또다시 다짐했다.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고 나서야 비로소 수많은 말들을 마주할 이유와 용기가 생겼다.


오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기로 다짐한 날, 가장 발목을 잡았던 건 위패에 들어갈 내용이었다.


故 ○○○

生 19○○年 ○月 ○日

卒 20○○年 ○月 ○日


이런 내용이 아니라, 자식으로서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이렇게 잘 컸다며, 기꺼이 감내하셨을 그 고통들 감사히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자식은 상실의 슬픔을 딛고 어떻게든 잘 살아갈 테니, 부디 편히 쉬시라는, 짧은 생이지만 잘 사셨다는 말까지. 반성과 감사와 사랑과 바람과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지만, 말의 양과 위패의 공간은 반비례해서 하고 싶은 말을 없애고 줄여야 하는 숙제가 남겨졌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위패에 이 감정과 마음을 어떻게 담아내야 할까. 만약 아버지께서 꿈에 나타나신다면, 그래서 딱 1분만 대화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말씀을 드리고 싶을까.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을 잊지 않고 용기 내어 살아갈게요.

다시 만날 그날까지 고통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계세요.’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단 1분이 주어진다면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말은 이런 말이 전부였다. 아버지께 표현하고 싶었던 감사와 사랑,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 그럼에도 우리 행복하자는 응원. 그것이 거품과 여유를 들어내고 났을 때 남는 마음의 뼈대였다.

그나마도 길어서 아직 들어가지 못한 말을 줄이고 줄여 드디어 위패에 적을 내용이 완성되고, 지인에게 보내자 돌아온 말이란,

“음, 글 쓴다는 사람이 겨우 이 정도라니, 좀 실망스러운데?”

글 쓰는 사람은 위패 내용이 남달라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기대 같은 것들이 있음을 깨달으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머쓱해져선 다른 사람들의 위패에는 뭐하고 써 있을까 궁금해서 샘플을 뒤져보는데, 주로 들어가는 내용이란 결국 다시 ‘감사, 사랑, 행복, 안녕’일 뿐, 특별할 것도 대단한 것도 없어 보였다.


마음을 포장할 말들을 끄집어내 볼까 고민하다 그러지 말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특별해 보이기 위해 전달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지어내고 싶지 않았고, 남들과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집어넣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마지막 말은, 살아생전 아버지와 나눈 일상의 언어로, 우리가 공유하는 평범한 단어로 마지막 말을 전하기엔 충분하니까.

아름다운 표현을 찾고, 그럴싸한 단어를 찾기보단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더 시간 들여 고민한 것은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표현만큼 더 잘 전해지는 말은 없기 때문이었다. 응급상황을 만난 승무원이 온갖 꾸밈을 빼고 용건만 간단히 말한 것처럼.




비행 중에 응급상황을 만나면 승무원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해 다룬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평소에는 나긋나긋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존댓말로 대응하던 승무원들이, 긴급상황에 처하면 “머리 숙여, 벨트 풀어, 뛰어내려” 같은 용건만 아주 짧게, 그것도 큰소리로 말한다는 것이다.

친절한 승무원 이미지를 생각하면 다소 이질적이지만, 침착한 말투로 말하면 승객들이 상황의 위급함을 모르고, 존댓말은 내용을 전달할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효과적인 전달과 신속한 대응을 위해 이와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러겠구나 싶었다.


실제로 실험해보니 “고개를 숙이십시오. 벨트를 묶으십시오. 탈출해야 하니 서둘러 움직이십시오.” 하는 것보다 “고개 숙여. 벨트 풀어. 탈출해!” 했을 때 대피 시간이 줄어들었다.

생각해보면 응급상황에 닥쳤을 때 “승객 여러분, 지금 응급상황이 발생했사오니 가지고 계신 짐이 보물보다 소중하더라도 미련 없이 내려놓으시고 산소마스크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겐 정들었던 물건들과 작별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습니다. 비상탈출구를 통해 탈출할 때에는 저 바다의 소금물에 잠시 절여지는 배추가 된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슬라이딩하시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차가운 바다가 승객 여러분을 맞이하겠지만 당황하지 마시고….”

이렇게 방송하면 이게 뭔가 싶을 거다. 진짜인지 심각한 건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탈출할 골든 타임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말하는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말을 할지, 그 말을 어떻게 표현해서 전달할지 역시 중요하다. 상황에 따라 말의 내용도 말하는 방법도 바뀌어야 하려는 말이 왜곡없이 더 정확하게 전달된다.


결국 이십 년 가까이 묵혀두었던 아버지를 향한 마지막 말은 지극히 담백했고, 평범했다. 언젠가 어버이날에, 생신날에 드렸을 편지에 적었을 법한 내용들. 결과적으론 고작 이렇게 담백하고 평범하게 끝낼 마지막 말을 이렇게나 오랫동안 끌고 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오랜 세월이 말을 다듬고 말을 걸러 한두 문장, 두세 문장의 말로 끝낼 수 있게 되었으리라.



아버지의 위패를 새로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

그곳에서 하나둘 다른 가족들이 남긴 고인을 향한 마지막 말들을 떠올렸다. 지극히 평범하고, 식상하고 뻔해보이기까지 하는 말들. 특별할 것 없이 흔해 빠진 말들. 망자를 기리는 마지막 문장이 일상의 언어 범주 내에 존재하고 있는 건, 많은 사람이 화려하고 특별한 무언가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고, 그럼에도 그 속에 담긴 진심과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의 크기가 있음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상의 언어에 마음을 담아 주고받으며 떠난 자와 작별하고, 옆에 있는 자들과 오늘을 도모한다. 그러다 보면 또 전하지 못한 말이 쌓이고, 전하고 싶은 말이 쌓이게 되겠지. 그래서 마음이 또 묵직하게 차오르면 그때 또 마지막 아닌 마지막을 전하게 될 것이다. 별 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간단명료한 말들로.

시간이 흘러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 켜켜이 쌓이면 아버지의 위패에 곱게 적은 편지 하나를 놓아두고 와야겠다.



“가을 낙엽과 함께 먼 여행을 떠난 아버지.

눈물을 먹고 자란 이별의 꽃은 눈이 내리고 비가 내려도 시들지 않겠지만,

봄볕같이 따뜻했던 추억으로

여전히 사랑 속에 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계신다는 그곳엔 고통도 속박도 없길,

사랑과 행복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시길.”



(이미지 Beverly Buckley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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