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아주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여기에 내가 포함된다.) 높은 레벨로 오르기 위해 어떤 전략을 구사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부캐 키우기. 부캐란 게임에서 본래 캐릭터가 아닌 새롭게 만든 부캐릭터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흔히 쉽게 빠질 수 있는 착각이, 부캐를 육성할 시간에 본캐를 열심히 키우는 게 더 유리하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온라인 게임은 협동을 요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은 언제든 나를 도와줄 존재가 있으면 유리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게임을 실행할 수 있는 도구도 다양하다. 그래서 쓰지는 않지만, 집에 짱박아 놓기엔 아직 성능이 좋은, 출시된 지 1~2년이 지난 휴대전화가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휴대전화를 바꾸면 새로 구매한 휴대전화에 게임의 본캐를 로그인하고, 이제는 뒷방으로 밀려난 신세로 전락한 휴대전화에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한다. 본캐로 게임하는 중간중간 부캐도 키우는 멀티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번거로워 보이지만 부캐는 본캐에게 아주 도움이 된다. 내가 하는 게임을 예를 들어보면 본캐가 필요한 물건을 부캐가 줄 수 있고, 본캐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부캐가 도와줄 수 있다. 본캐와 부캐가 팀이 되어 협동 레이스를 펼치면 혼자 한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얻을 수 있다.
본캐 하나만 외롭게 키우는 것보다 부캐와 함께 키우는 것이 더 빨리 크고, 더 잘 큰다.
어쨌든, 씁쓸하지만, 부캐의 존재 이유는 본캐를 더 잘 육성하는 데 있다. 본캐를 돕는 것. 그것이 부캐의 숙명인 것이다.
게임 이야기를 너무나 길게 실컷 떠들었지만, 나에게도 본캐가 있고 부캐가 있다. 진짜 나의 모습은 본캐이고,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본캐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이 바로 부캐이다.
나의 본캐는 ‘게으르고, 귀찮아하고, 예민하고, 착하지만 욱하는...’ 등등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인지라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대할 때는 부캐가 등장한다. ‘적극적이고, 나서서 하고, 관대하고’ 등등의 성향을 가진 부캐가.
본캐와 부캐의 성향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지킬 앤 하이드 같은 내 모습을 보면서 어느 날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 장모님께도 그렇게 하면 안돼?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이해해드리고, 격려해주고 아껴드려 봐. 그럼 장모님께서 엄청 좋아하실 걸?”
남편은, 엄마와 통화하는 동안 몇 번을 욱했지만,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써 침착을 유지하려는 내 모습이 웃겼나 보다.
한편으로는 딸이 풍기는 ‘난 지금 엄청 화가 났지만, 겨우 참고 있어.’의 분위기를 감지하셨을 장모님이 안쓰럽기도 했을 거고.
단적인 이야기였지만, 나는(비단 나뿐이겠냐만은), 살면서 수없는 가면을 쓴다. 딸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회사인으로서, 친구로서. 위치와 역할과 상황에 맞춰 적절한 가면을 쓰는 것을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면을 쓴다.
가면을 쓰는 것을 나쁘게만 말할 수는 없다. 게임 속 부캐를 키우는 것처럼, ‘나’라는 본캐를 돕기 위해 가면을 쓴 여러 부캐를 만들고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본캐가 받을 충격을 줄일 수 있고, 더 효과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남편이 내게 요구한 것은 내가 본캐의 영역이라고 지정한 곳에 부캐를 집어넣으라는 뜻이었다. 가장 편한 존재인 가족들에게까지 부캐를 투입해야 한다는 것은, 지금 내 생각으로는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그렇게 하면 내가 온전한 본캐의 모습대로 존재할 수 있는 경우는 언제란 말인가.
오직 사람과 분리되고 세상과 멀어져 혼자 있을 때, 그때가 유일하게 본캐로 존재하는 경우라는 사실은 너무 슬프다.
내가 본캐와 부캐를 구분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회사를 다니면서 만들어낸 수많은 부캐와 쓰길 마다하지 않은 수많은 가면들. 그렇게 부캐 모드와 가면 쓰기가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부캐를 본캐라고 인식했다. 본캐를 도와야 하는 부캐의 역할을 잊고, 어느덧 부캐가 본캐처럼 활동한 것이다.
이 역전 현상 때문에 화가 났고, 우울했고, 몸과 마음이 괴로웠다. 부캐의 활동이 왕성해지고 영역이 넓어질수록 상처받고 괴로운 것은 부캐가 아닌 본캐였다.
본캐와 부캐를 구분하지 못하면 괴롭다. 부캐가 너무 자주 등장해 어느덧 본캐의 지위에 오르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 순간까지 부캐를 등장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아니, 종종 엄마와 싸우고 그로 인해 화가 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