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래될 인연을 그리며

by 임경미


요즘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드라마를 부쩍 찾아봤다.

노년의 우정. 세월을 한바탕 질펀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끝즈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게 궁금해서 나의 노년을 그들의 삶에 투사하며 관람자인 듯 당사자인 듯한 위치에서 그들을 겪었다.

지금은 <서울체크인>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빠져 있다. 가수 이효리 씨가 서울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 그들과 나누는 수다. 함께 드러내 보이는 표정과 생각들을, 마치 그 자리에 동석한 사람인 듯 공감하고 대화하며 또 겪고 있다.


그 시간을 보내며, 네모난 화면에 보이는 그들의 영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응시하지도, 시청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 시간을 겪어내고 있다. 내가 그들과 함께라는 의식이, 함께이고 싶다는 바람이 겪었다는 표현을 집어 들게 했다.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 미워했던 때가 있었다. 실망하고 낙담해서 포기했던 때도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좋았고, 함께 하는 것이 좋았을 때도 있었지만, 세월의 흐름은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인생.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내 곁을 함께 했던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는 떠난다. 나는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들 역시 언젠가 나를 떠난다.

학창시절 지지고 볶았던 친구들, 회사 다닐 때 힘이 됐던 동료들, 어떤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하나의 목적 아래 모인 사람들.

수많은 사람 중에 아주 적은 사람만이 아직 연이 닿아있고, 더러는 얇디얇은 실가닥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언젠가는 떠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이 떠나거나 내가 떠나거나, 아니면 남거나. 경우의 수는 단 세 가지뿐이다.


만나고 떠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자연스럽다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일 테다. 그래서 나는 매 순간 함께였지만, 결국 혼자였다.

내 지인은 짧게 머물렀다가 스쳐가는 사람을 ‘시절 인연’이라고 불렀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에 동의했다.


인연(因緣)이라는 말에 사람이 없어서, 결국 인간은 혼자이길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인간의 인연. 머물다 떠나는 사람에게 인연이라는 단어를 붙여 관계성을 농축시켜도 그것은 하루살이 정도의 인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지인의 말을 빌려, 내 인연들을 시절 인연으로 규정하고 나니 인연의 속성이 그러함을 받아들일 수는 있게 됐다. 이건 내 잘못도 아니고, 네 잘못도 아닌 거야. 삶이 만들어낸 하나의 시스템일 뿐인 거야. 그러니 떠나는 시절 연인의 등 뒤에나마 꽃송이를 뿌려본다. 어디 있든 축복과 행복이 가득하길.

하지만 찰나가 아니면 조금 더 길 뿐인 우리의 관계가 내심 두렵고 서운한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70살이 되고, 80살이 되었을 때 내 곁에는 누가 있을까. 그 무렵에 알게 된 또 다른 사람들? 요양원에 들어가서 만난 또래의 사람들?

그들이, 내가 아프다는 소식에, 함께 떠나자는 이야기에,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진 듯 걱정해주고, 주저 없이 달려와 주고, 열불을 내며 화를 내줄 수 있을까.


시절 인연의 짧은 시간의 길이가 그보다 더 깊어야 할 마음의 깊이로 발전할 수 있을까.



“내가 요즘 보는 드라마가 있는데…. 내가 늙었을 때 저런 친구가 내 곁에 있을까. 누가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가만히 얼굴을 떠올려 봤는데….”


나의 하소연이 이어질 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있잖아. 내가 그렇게 해줄 거야.”


나이가 들고 지금보다 더 지쳤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 날카롭게 세워뒀던 가시를 누그러트렸을 때, 여기저기 찔려서 피가 나는 상처를 드러낼 때, 그런 나를 보듬어 줄, 찰나의 시절 인연이 아닌, 인생 인연이 내게 있다는 것이 힘이 되어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것은 분명 안도와 감사함이었을테지. 인연의 속성이 어떠하든 그렇지 않은 인연 또한 있음이 증명되었으니까.


요즘은 내 곁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감사함을 부쩍 느끼고 있어.

나의 이런 고민들도 내 이야기처럼 들어주는 네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내게 네가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야.


언젠가 가깝거나 혹은 먼 미래에 오늘 우리의 대화도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긴 시간동안 차곡차곡 함께 쌓아갈 이야기들을 풀어낼 그 순간이 핑크빛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나의 오래될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사진 출처: tvn 디어 마이 프렌즈)

시절인연이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의미와는 달리 쓰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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