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범벅된 현실과 환상 이야기
나는 고무장갑 안이 땀으로 축축해질 때까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허리가 묵직해지고, 목이 뻐근해졌다. 그럼에도 개수대 안에는 씻어 올려야 할 그릇이 잔뜩 쌓여있었다. 도대체 며칠 동안 쌓아놓은 그릇인지.
그는 치울 줄을 몰랐고, 치워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집안일은 내 몫이었고, 뒤치다꺼리하는 것 역시 나의 몫이었다.
뚝- 퓨즈가 끊기듯 이성은 로그아웃 되고, 그릇에 달라붙어 말라버린 밥풀마냥 떼어내기 힘든 감정이 덕지덕지 달라붙기 시작했다.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고 있는 거야?
지겨워, 진짜!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되는 거지?
1년 365일 무한 반복되는 집안일의 굴레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고무장갑을 벗어던져야 했지만, 왜인지 그럴 수 없어 신경질적으로 그릇을 닦았다.
이 행위를 지속하게 만드는 것은 오기일까, 정화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으로써 나를 다독거리고 싶어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설거지는 계속됐다. 짜증을 삭히고, 화를 내고를 반복하며 개수대에 쌓인 그릇들을 절반쯤 줄였을 때, 남편이 유유히 걸어들어왔다. 그리곤 마치 부엌은 내 영역이 아니라는 듯 먼발치에 서서 내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 내가 방금….”
그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다. 그러나 어디 가서 누굴 만났고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하는 신이 난 그의 목소리와 반비례하게 내 기분은 더 가라앉았다.
내게 지금 필요한 건, 별 영양가 없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과 감당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인지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에 푹 빠져 있었다.
시끄러워. 듣고 싶지 않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
어차피 그의 말은, 절반은 물소리에 묻히고 그중에 또 절반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묻혔다. 저이가 뭘 하고 싶은 심산인지 이해할 여유도, 알아차릴 방법도 없었다. 설령 이유와 방법을 알았다 한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순간 내가 명확하게 안 것은, 그의 목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것.
“나 지금 설거지하는 거 안 보여?
중요하지도 않은 말 그만해. 짜증 나니까.”
결국 꾹꾹 눌러담지도, 그렇다고 해소하지도 못한 감정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오래 묵힐수록 빛을 발하는 것에 감정이 포함될 순 없다. 알면서도 또 참았고, 참지 못해 밖으로 격렬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런 내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남편은 투덜거리며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렇게까지 짜증을 내냐?
누가 너보고 하랬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할 거면 생색내고 화내지나 말던가.
막말로, 그거 조금 안 한다고 세상이 어찌 되냐?”
뭐라고?
저게 지금 할 소린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평소답지 않은 그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미안해, 그랬구나.’ 하는 이해와 배려가 아닌, 원망과 비난이 내게 화살로 날아오다니.
나는 아내든, 남편이든, 여자든, 남자든 서로가 해야 할 역할이 있고,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고 믿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부분은 희생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의 말은 이런 내 신념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상대를 향한 배려 없이 본인만 생각하는 그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없이 자기만 맞다고 주장하는 그가, 너무 밉고, 정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우리의 관계는 이제 신뢰도, 이해도 없다.
인내심은 한계를 드러냈고, 인격은 어느덧 바닥을 쳤다.
이번 일은 좌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당장 쫓아가서 할 말은 하고, 따질 건 따져야지!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결단을 내야지!
허겁지겁 고무장갑을 벗었다. 아니, 고무장갑을 벗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세제가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헹구는 것도, 땀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손가락을 고무장갑에서 빼내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아이씨. 이 고무장갑은 왜 이렇게 안 벗겨져!!
욕이 나오고, 짜증이 정점으로 치달았을 때,
…
…
…
…
…
그렇게 눈이, 번쩍, 뜨였다.
응?
응?
뭐지?
꿈인가?
뭐야, 꿈이었어?
이렇게 화가 나고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이 생생한 감정이 꿈이었다고?
현실과 거짓의 경계를 구분하느라 당황한 내 귓가에 씩씩, 숨을 내쉬며 자는 남편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 꿈이었구나. 그래, 그럴 리 없지.
아, 억울해.
나는 지금 이렇게 화가 났는데, 너는 속 편히 잠이 오는 구나.
으이구!
결국 나는, 곤히 자고있는 남편의 머리를 콩 쥐어 박고 말았다. 왠지 억울한 마음과 짜증과 황당함을 실어서.
“응? 왜? 무슨 일 있어?
내가 또 코를 크게 골았어?”
남편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지만, 꿀밤을 쥐어박고 나서야 아차 싶어진 나는, 미안한 마음에 ‘네가 꿈에서 짜증나게 했어!’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코를 골며 자는 척 연기를 하고 말았다.
영문도 모르고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남편의 어느 주말 아침.
꿈에서도 생생하게 감정을 쌓아올릴 수 있음을 경험한 나의 어느 주말 아침은 그렇게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게 열렸다.
“여보, 미안. 사실 아까는...”
물론, 그 이후에는 폭 엥기며 사과하고 싹싹 빌었다(?)는 후문이….
(사진 출처: Gerd Altmann from Pixab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