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 많아서 걱정이라고요?

by 임경미


“2000년 6월 28일 미리 예고됐었던 그들이 왔다. 더 이상, 아,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미랜 없는가.”


20세기 말 가요계를 주름잡은, 그리고 내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던, H.O.T.라는 남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 <늑대와 양>은 6월 28일에 무언가 예상치 못했던 재난이 닥칠 것을 가정한 멤버 장우혁의 샤우팅 랩으로 시작한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갈 무렵, 세상은 시끌시끌했다. 이 노래의 랩까지 달달 외워 따라 부를 정도로 노래를 많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들어는 봤는가. 혹은 기억하는가. 그 시절 우리를 공포와 불안으로 안내했던 ‘밀레니엄 버그’.


괴담의 내용은 이러했다. 1999년 12월 31일 23시 59초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때 2000년의 00을 1900년의 00으로 인식하는 오류가 발생하면서 컴퓨터가 어쩌고저쩌고, 통신 장애가 어쩌고저쩌고, 금융 거래가 어쩌고저쩌고. 지금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어쩌고저쩌고 들의 연쇄 작용 때문에 세계가 대혼란에 빠진다는 괴담이었다.


산 날보다 살 날이 더 많이 남았을 텐데.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구나. 그 당시 우리는 서로가 TV와 잡지에서 얻은 정보들을 교환하며 걱정을 눈덩이보다 더 크게 키우며 다가오는 대혼란의 시대엔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했다.


괜찮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이 문제를 예상해서 잘 대응할 것이라는 누군가의 이성적인, 혹은 긍정적인 분석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문제란 항상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아주 사소한 균열로 시작되지 않던가. 그렇게 우려와 불신 속에서 속절없이 시계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결국, 드디어 2000년. 아직도 생생하다. 2000년 1월 1일을 알리는 재야의 종소리를 들을 때 가만히 눈알을 굴리며 TV는 제대로 나오는지, 전화는 되는지, 어디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던 그 숨 막히는 3분 정도의 분주함을. 10분, 20분이 흐르고 세상이 문제없이 2000년을 맞이했구나 안심이 드는 순간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전문가들이 손 놓고 있겠냐고!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그 시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야 이 무슨 허무맹랑한 소동이냐며 어이없다 하겠지만, 또 모를 일이다. 2099년에서 2100년을 지날 무렵에는 어떤 노스트라다무스가 나타나 무슨 예언을 하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릴지.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그럴싸한 걱정이지 않은가. 요즘도 가끔 통신사 서버에 문제가 생기면 예매해 놓은 기차표를 확인할 수 없고, 물건값을 결제할 수 없고,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뉴스를 볼 수도 없고, 지인과 가족은 안전한지 연락할 수도 없으니. 하물며 지금보다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는 것도 적은 아이였다. 공포는 무지와 타인의 말과 확신 사이를 반복하며 점점 진짜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믿음으로 변신했다.

한 보험회사에서 ‘걱정인형’이라는 것은 모델로 광고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걱정 인형을 알리는 광고에서는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걱정인형은 인디언들이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걱정거리를 인형에 털어놓고 자면, 다음날 걱정이 모두 사라진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걱정하는 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다리 밑을 지나갈 땐 다리가 무너지면 어쩌지, 풍선을 불 때는 풍선이 터지면 어쩌지, 자고 있는데 도둑이 들어오면 어쩌지, 북한이 남침해오면 어쩌지, 백두산이 폭발하면 어쩌지, 약속 시간에 늦으면 어쩌지, 버스를 오래 타고 갈 때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면 어쩌지, 저 사람이 길을 잃으면 어쩌지, 강아지가 비를 맞아서 아프면 어쩌지 하는 걱정들. 그리고 걱정이 낳은 또 다른 걱정들과 덧붙여 나는 왜 걱정이 많은 걸까 하는 걱정까지.


엄마는 조잘대며 걱정을 쏟아내는 내게, “따신 밥 먹고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심심하면 소금이나 집어 먹어” 하시며 걱정을 달고 사는 나를 나무라셨지만, 나의 걱정은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찾아왔다. 상황이 이랬으니 걱정을 달고 사는 내가, 나 혼자만 걱정하지 않고, 전 세계인이 함께 같은 걱정을 하는 ‘大 걱정의 축제’는 한편으로는 짜릿하고 신나면서도 웃긴 경험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걱정이라는 녀석은 또 얼마나 끈질기던가.

걱정은 언제나 연쇄작용을 한다. 한 권의 책을 내는 과정에서 나를 찾아온 걱정의 연결고리를 보면 녀석의 집요함을 눈치챌 수 있다.

막 목차를 정할 때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걱정하고, 투고를 할 때는 원고를 마음에 들어하는 출판사를 만날까 걱정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 책이 제 날짜에 나올지 걱정하고, 책이 나오면 사람들이 내 글을 마음에 들어할까 걱정하고,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까 걱정하고, 새 책을 위한 목차를 정할 때는…. 휴, 여기까지 하자.


뉴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했을 때의 걱정 대소동도 그렇고, 일상적으로 나를 찾아왔던 수많은 걱정도 그렇고, 돌이켜 생각하면 왜 그렇게까지 걱정했을까 싶다. ‘저런 말들에 나는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많은 사람이 휘둘릴 수 있구나, 결국 해낼 수 있는 것을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 뒤에는 약간의 씁쓸함도 감돌면서 말이다.


결국 당시에는 제법 그럴싸했던 걱정도 훗날 돌아보면 쓸데없는 괴담에 불과한 것이다. 있을 법 하지만 생기지 않은 일, 생기면 고통스러울 테지만 실제로 발생하지는 않아서 고통스러운 적 없던 일, 걱정하는 것 빼고는 그다지 할 방법도 없는 그런 일. 이런 게 내가 걱정했던 것들의 실체였다. 게다가 걱정하는 것의 90%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설령 걱정이 발생했다 한들, 그나마도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발생해버리면 완벽하게 대비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는 이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일들을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붙들어 놓고 자꾸 바라보고, 자꾸 생각하고, 자꾸 고민하며 걱정하는 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어린 내가 가지고 싶었던 걱정인형. 그 인형이 있었더라면 내 걱정의 양은 좀 줄어들었을까. 인형이 없어서는 아니겠지만, 나는 여전히 걱정의 한복판에 산다. 내 마음의 집 주변에는 걱정의 수로가 휘둘러 있어서 만일을 사태를 대비하며 항상 경계 태세를 하고 있는 감시병마냥 뜬 눈으로 감시를 하는 걱정 전담 세포가 있다.

언제쯤 이 걱정 전담 세포가 일을 조금만 하고 쉬게 될까. 한바탕 걱정하고 난 뒤, ‘휴, 별거 아니었네. 다행이야. 이제는 마음 놓이지?’라는 말로 나를 다독이다 보면 조금씩 걱정의 강도와 빈도가 줄어들까. 걱정하고 있는 내 마음이 안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방법을 생각해보고 계속 움직이다 보면 걱정했던 것이 해소될까. 아니면 그래, 그게 걱정이었구나 라고 한바탕 신나게 맞장구 쳐주면 제 풀에 지쳐서 그만하게 될까.

그러나 녀석도 많이 지쳤을 것이다. 걱정이라는 녀석은 언제나, 걱정하는 동안 많은 에너지와 감정을 빼앗아 가며 몸집을 키우다가, 걱정이 무의미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안도하며 김을 빼는 식으로 또 다시 한번 에너지를 빼앗아 가니까. 남는 건 ‘다행이야’ 하는 한숨이 전부였으니까.


이제야 ‘걱정 좀 하지 마’라는 윽박 대신, 걱정이라는 녀석을 마주한다. 내 마음속 걱정 전담 세포를 마주한다. 그리고 녀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녀석은 그럴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존재다. 지금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 잘 살고 싶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안전하고 싶은 마음, 불확실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다 가지고 태어났으니까.


그래, 이런 너에게 걱정하는 건 하나도 좋을 게 없다고, 제발 좀 쓸데 없는 걱정일랑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구박한다 한들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조금씩, 그리고 자주.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세상에서 공포에 휩싸이는 녀석을 마주해야겠다. 자꾸만 불확실한 세상에 머무는 시선을 확실한 지금으로 돌리고, 언젠가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을 탐구하는 정신을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하는 것으로 돌리며, 조금씩 녀석이 안정감을 경험하도록 해주어야겠다.



(이미지 by Ryan McGuir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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