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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Aug 10. 2022

착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에서 흔히 봐왔던 말이지만 한 번도 이런 말에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책에서 말하는 것이니 틀릴 리 없었고, 그러니 무조건 수용할 뿐이었다. 

어린 나는 구박과 시련을 이겨내고 결국 복을 받아 행복하게 사는 신데렐라, 백설공주, 콩쥐, 흥부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며 나 스스로 벌을 받는 계모가, 혹은 놀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이런 통제 때문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나는 매사에 느끼지 않아도 될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는 했다. 모금함에는 꼭 돈을 넣어야 했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도와주어야 했고, 누구의 부탁이든 들어주어야 했다. 만약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면 온종일 마음이 불편해 죄책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리곤 생각했다. 

‘나는 착한 사람이야. 그래서 해피엔딩일 거야.’     




<더 임파서블>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를 소개하는 한 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때 영화를 소개하는 멘트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주인공 가족이 베푼 선행 덕분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모두 만나게 되었네요.”    

 

휴가지에서 쓰나미를 만나 서로 흩어진 가족들이 무사히 생존해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만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감동적인 이야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소개하는 와중에 패널 중 한 명이 한 말이었다. 이 말을 듣고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쓰나미로 죽거나 다치거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다소 비약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그동안 선행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재난을 당한 것일까. 불현듯 찾아오는 비극의 원인이 개인의 악행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그동안 목격해온 세상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착한 사람들이 더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질병과 고난에 허덕이고 있지만, TV를 보면 많이 가진, 부도덕한, 악랄한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만 살고 있지 않던가. 세상엔 착해도 괴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악해도 잘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자주 목격해 이미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것은 좋지만, 때론 벌 받지 않은 악도 있고, 상 받지 못하는 선도 있었다. 착하게 살면 동화 속 주인공처럼 행복질 줄 알았고, 나쁘게 살면 마찬가지로 동화 속 나쁜 주인공들처럼 벌 받을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권선징악은 맞는 말일까. 과연 신은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무렵, 이 세상은 불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임을 절실히 느꼈다. 상복을 입고 아버지의 빈소를 지키며 앉아있는 나에게 아버지가 다녔던 교회 목사님께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귀히 여겨 먼저 데려가신 거니 슬퍼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하나님의 곁에서 쓰임을 받으며 영광을 누리실 거야.”     


목사님, 아버지가 귀히 여김 받는 하나님의 자손이라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오래도록 살다 오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버지의 삶이 죽음보다 못한 고난이었나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드디어 하나님의 곁으로 가는구나 하고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이면서 왜 하필 우리 아버지를 쓰기 위해 데려가시나요? 

18살인 나이에 아버지를 빼앗길 정도로 제가 못되게 살아왔나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결국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따지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착한 아이로 살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수많은 경험이 알려준 진실, 이제는 안다. 

착한 아기가 복을 받는다는 말은 나의 행동과 생각을 꽁꽁 묶어두는 족쇄였다는 것을. 착해도 안 좋은 일은 당할 수 있고, 악해도 좋은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착해도 시련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순간에 나를 찾아온 말들은 괴롭고 힘들어하는 존재를 위로하기 위한 말 한마디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중에 상을 받는다는 말로, 훗날 행복해질 것이라는 말로, 소중해서 먼저 데려가셨다는 말로 상처받아 아픈 마음의 상실을 다독거리려 했다는 것을.     



더는 시련 앞에서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나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제야 신을 향했던 비난과 오해를 푼다. 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그저 모든 것은 나의 잘못된 기대이자 착각이었을 뿐이다.     



“이런 러시아 속담이 있다. ‘뻔뻔스러움은 둘째가는 행복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균형력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그래도 우리는 신께서 그런 무뢰한들을 벌해주시기를 바란다. 정의가 승리하고 악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슬프게도, 자연은 정의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끝없는 불행에 시달리는 것은 죄책감을 타고난 착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후안무치한 냉혈인간들은 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종종 ‘노력’의 대가로 성공을 누린다.”

[리얼리티 트랜서핑] 중에서



(이미지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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