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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Aug 17. 2022

우산의 의미

사랑과 보호를 원했던 마음에 대하여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몸이든, 마음이든 다치지 않고 무사하길 바란다면 힘든 것은 없는지 살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도와야 하니까.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결계를 칠 때 그만한 내공이 쌓여야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지키는 일에도 그만한 힘이 필요하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올해 여름. 외출할 때면 우산을 꼭 챙겨야 했던 날이 많았다. 언제 어디서 필요할지 모르는 만일의 상황을 위해 곱게 접은 3단 우산을 가방에 꼭꼭 담아 다녔다. 그리고 마침 우산이 필요할 때가 되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날도 마침 비가 내렸고 어쩔 수 없이 우산을 꺼내 펼쳐 들었다. 빗줄기가 쏟아지는 인도 속으로 뛰어들자 팽팽하게 펴진 우산의 천에 ‘토독토독’ 하고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에서 만들어지는 소리는 제법 요란하지만 그에 비해 옷은 젖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든든해지고는 했다,

‘우산이 나를 지켜주고 있어.’     


-


하지만 우산이 내가 젖지 않게 지켜주는 것은 100% 우산의 의지는 아니었다. 우산이야 비를 가리는 용도로 이 세상에 왔지만, 어떤 녀석들은 해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고, 어떤 녀석들은 자동차 앞 유리로 들어오는 강한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우산은 비를 가리는 용도로 쓸 때 가장 빛을 발하겠지만, 그 대단한 능력도 막상 비 내리는 날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우산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이유는, 마침 우산을 잘 챙겼고, 비를 맞기 싫어하는 내가 우산을 펼쳐 들었고, 그렇게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쪽 팔의 자유로움을 희생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바람에 우산이 자꾸 흔들리는 게 귀찮다고, 한쪽 팔에도 자유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우산을 접어버리는 순간, 나는 비를 맞게 되고 우산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우산이 나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내가 나를 지키고 있는 것인지 애매모호 하다. 아니, 그래도 우산 덕분에 더 효율적으로 비를 피할 수 있으니(예를 들면 책으로 머리를 가린다거나 영화 [클래식]의 주인공처럼 자켓으로 비를 가릴 때보다는 더 비를 잘 막을 수 있지 않던가.) 나와 우산의 협동은 멋지게 비를 피할 수 있게 만든다. 그렇게 내가 나를 지키고, 무언가가 나를 지켜주는 경험. 그 경험을 올여름 무수히 많이 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우산과 나의 협동이라는 말로 우산의 노력을 규정했지만, 매번 비를 맞으며 느끼는 무엇인가가 나를 지켜준다는 생각은 우산을 의미 있는 물건으로 만들었다. 비로부터 나의 몸을 지켜주는 것은 그 외 어떤 것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의 생일에 우산을 선물하고는 했다. 우산이 비를 막아주는 것처럼 든든한 보호막이 당신에게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담아서. 내가 우산에 불어넣은 의미는 ‘사랑’과 ‘보호’, ‘희생’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덤벙거리는 성격에 내 것을 잘 챙기지 못했던 나는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깜빡하고 빼놓고 오기 일쑤였는데, 이런 성격은 비가 내리는 날에도 빛을 발했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탓에 하굣길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맨몸으로 맞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비를 조금이라도 피할 요량으로 두 손으로 아치를 만들어 머리를 가리고 뛰어가면 교문 앞에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직 펴지 않은 여분의 우산을 든 엄마나 아빠들이 두리번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목을 길게 빼고 연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자신의 딸이 나오는지, 아들이 나오는지 찾고 있던 사람들. 급하게 뛰어오던 나는 그 무리들 맞은편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한 마리 미어캣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엄마도 우산을 들고 나왔으려나?’     


그러나 기대감에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들 사이에 엄마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속이 상해서는, 비를 맞는 거 따위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달리던 걸음의 속도를 줄이고, 손으로 만든 아치도 푼 채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홀딱 젖은 옷을 벗어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저녁 시간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물기 가득한 옷을 보고 언성을 높이셨다.


“그러게. 일기예보 확인한 다음에 비 온다고 하면 우산을 미리 챙겨놨어야지. 넌 왜 이렇게 칠칠하지 못하니?”


눈치 빠르고 꼼꼼한 엄마는 젖어있는 옷만 봐도 내가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셨나 보다.

그런데 비를 맞아 젖은 옷보다 내 마음이 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엄마가 옷을 빨아 보송하게 말려주는 것처럼, 왠지 속상한 마음을 보송하게 말려주길 바랐다.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듣고 기다리지 않는 엄마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고 혼을 내는 엄마도 서운했다.     




하지만 시간은 많이 흘렀고,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어린 내가 아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산을 가지고 마중 나오지 않은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많이 희석되어 지금은 어렸을 때 내가 그런 마음이었다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일하느라 마중 갈 여력이 안 됐다며,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린 오해 아닌 오해를 풀고 한바탕 웃으며 추억을 회상했다.     


그 무렵 내가 받고 싶었던 엄마의 사랑과 보호를 꼭 우산으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엄마의 사랑을 우산으로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가 비를 맞을 상황에 한걸음에 달려와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라고.

나의 투정은 우산을 사랑이자 희생이자 보호의 상징으로 만들었고, 그 오랜 공식은 이제 상처가 남아있건 사라졌건 상관없이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엄마는 관절을 닿아가며 돈을 벌고, 잠을 줄여가며 우리를 돌보는 것으로 나를 지키고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고 계셨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더 많은 것을,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내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


얼마 전 백화점에서 예쁜 우산을 하나 샀다. 연한 베이지색 바탕에 노란 꽃이 프린트 된 장우산.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어 보이는 튼튼한 우산살에, 크기도 넉넉해서 비를 잘 막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그런 우산을 하나 샀다. 이렇게 튼튼하고 예쁜 우산이 있으니 비가 내려도 걱정이 없다. 나를 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조금 더 알 것 같다. 우산이 있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럴 때가 아니어도 나는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비 오는 날 비를 맞지 않아야만 보호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그 힘들이는 일은 이곳저곳, 여기저기서 일어나도 있다는 것을 더 알아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되면, 여전히 내게 사랑과 보호의 상징이던 우산의 의미가,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 희석되듯 그 의미도 점점 희석될지 모를 일이다.




(Pixabay의 Victoria_Borodinova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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