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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경미 Oct 06. 2022

인생의 속도를 줄이는 법

32살엔 시간이 시속 32km로 달리고, 64살엔 시간이 시속 64km로 달린다고, “나이 먹어봐, 시간은 앞으로 점점 더 빨리 갈 테니까.” 하며 네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건, 내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에 비하면 느린 거라는 식의 말을 종종 들었다.

그게 아니면, “나도 그래. 요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니까.” 하는 동조의 말.     


누구에게나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해를 거듭할수록 2G가 3G, 3G가 4G, 그리고 4G가 5G로 바뀌며 인터넷 속도만 빨라진 게 아닌 듯하다.      

약 10개월 전, 또 다시 한 해가 저무는 것에 대한 감상에 젖었던 게 (엊그제 정도는 아니고) 몇 개월 전인 것 같은데, 어느덧 한 해의 달력은 얼마 남지 않았고, 일 년은 쇠락과 정리의 계절을 향해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은 빈약해지고, 시간을 빨리 흐르는 걸까.     

생각해보면 어린아이의 세상이란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낯설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기 바빴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눈앞에는 모르는 것이 놓여 있었고, 익숙해져야 할 것들과 배워야 할 것들이 가득했다. 신기하고, 경이롭고, 재미있고, 그렇지만 두렵기도 했던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 일상. 그 일상 속에서 매번 감탄하고, 하고 싶은 것들도 많았으리라.


그러나 어른의 일상은 다르다. 어른은 이미 경험할 대로 경험했고, 알만한 것들은 모두 알아버렸다. 그래서 재탕, 삼탕하듯 반복되는 일상은 푹 고아 우러나올 것 없는 곰탕만큼이나 밍밍하다.     

어른의 세계는 당연한 것들이 무수히 축적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하고, 지식과 규칙대로 움직인다. 일상이 마냥 그렇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 씻고 외출하고,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서 씻고 밥 먹고 휴대전화 좀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취침. 일도, 일상도 매번 똑같은 일로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된다.

    

언젠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권태로워졌을 때 공허하게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루해.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이것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무위고(無爲苦,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느끼는 고통)’. 무엇이든 하지만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느껴져서 찾아오는 고통이다.     

한 밴드는 그래서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떠난다고 했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고,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한다고도 했지만(노래를 끝까지 들어보면 한다는 건지, 원한다고 한 건지 애매하다) 그건 더더욱 힘들 것 같다.     




‘무위고’가 던진 질문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문은,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이 세트장의 문을 열고 나와 진짜 자신만이 세상을 찾아 떠나는 것처럼, 이미 세트장처럼 제법 그럴싸하게 구축된 내 세상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다시 그 세상이 익숙해질 때쯤 다시 그 세상을 깨고 나오는 것. 깨고 나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두렵다면 작은 변화라도 줘보는 것.     



변화는 거창하지 않아도 좋고, 색다름은 사소해도 괜찮다. 우리의 목적은 이미 그림이 가득 채워진 캔버스에 다른 색깔의 점을 찍는 것이지, 하얀 캔버스 위에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 올해의 기억 앨범 페이지를 늘릴 수 있을까.

따라하기 좋은 가장 쉬운 단계는 어제 보지 못한 것을 오늘 발견하는 것.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봐주는 것. 어제와는 다른 구름 모양을 발견하고, 어제보다 조금 더 커진 식물의 이파리를 알아봐주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알아보며 느끼고 깨닫고 생각하며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내용들을 확장시켜보자. 가령 오늘은 반려식물에 물을 준다던가, 퇴근길에 지인을 만나 식사를 한다던가, 매일 냉장고에서 꺼내먹던 반찬을 바꿔본다던가 하는 식으로 일상에 변화를 줘보면 어떨까.

그리고 조금 도전하고 싶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가끔은 세 정거장 먼저 내려 출근길을 걸어보고, 퇴근 후엔 아무 카페나 들어가 책 한두 장 읽어보기. 평소엔 듣지 않았던 노래 장르를 들어보고, 관심이 없어서 멀리했던 공연을 보러 가고, 경기도 보러 가고, 문화행사에 참여도 해보는 거다. 그리고 조금 더 진한,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시간을 들여 봉사 같은 활동을 해보면 어떨까.


그렇게 조금씩 일상을 익숙하지만 마냥 익숙하지만은 어떤 것들로 채워보는 거다.

인생의 속도가 조금은 줄어들 수 있도록.



(이미지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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