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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 오랜만의 엄마 노릇

엄마, 혹시 시간이 된다면...

by 윤혜경

*도라지꽃 (꽃말: 기품, 영원한 사랑, 탄생일: 4월 23일))


자주 안부전화를 하는, 어려서부터 속 깊은 작은 딸은 직장인이다. 매사에 대강이라는 게 없는 딸이라 키우는 과정에선 잘 자라는 모습에 뿌듯했다. 결혼 후 직장과 집안일을 늘 야무지게 마무리하려는 딸을 보면 '정리 강박'인가 싶어서 안쓰럽기도 한다. 거실부터 서랍 속에 이르기까지 단정하기 그지없다. 엄마인 나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내내 새벽녘까지 서랍을 정리하거나 장식장을 정돈하는 등 바깥일이 없는 시간에 무리해서 정리하고서야 잠이 드는 스타일이었지만 작은 아이는 더 심하다. 그냥 털털하게 키울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 익히기에 꽂혔던 신혼 시기에 비해 아기나 자신들의 먹거리는 요즘 트렌드인 레트로 상품을 구매하곤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회사에서 저녁까지 해결하니 집의 냉장고 용도가 엄마네와 달리 가볍다. 엄마 입장에서는 열심히 생활하는 작은 딸의 수면시간과 식사시간은 제대로 유지하길 바라는 마음이니 자주 안쓰럽다. 그렇지만 최근 1년여는 학위논문 준비로 엄마인 내 코가 석 자라 고개를 돌릴 여유가 없었다.


더 힘든 고교시절에도 힘들다는 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던 딸은 늦은 밤의 전화 안부중 문득


"엄마는 왜 아기를 소원해서... 난 진짜 눈물 나게 힘들어. 가끔 혼자 어딘가로 피신해서 쉬고 싶어"


를 처음으로 내뱉었다.


"네가 내 인생에 그랬듯이 너 닮은 아기면 슬기롭고 예뻐서 너의 삶에 축복일 거라고 생각했지."


"엄마가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엄마는 갈수록 더 바쁘잖아...."



마음에 없는 생떼를 쓰는 걸 보니 많이 힘겨운 상황인가 보다. 집값이 내리기를 기다려보자던 엄마의 의견을 따라서 그동안 미루었던 집 구매를 하늘 닿게 오른 상태에서 이제 아기와 정착할 집을 골라 아기 출산 전에 온 능력을 다 바쳐서 실행하고, 이사를 하고 집을 고쳤다. 다행히 산전산후 휴가가 있어서 배가 남산만 한 딸이 기술자들의 집수리 과정을 들여다보고, 꼼꼼히 희망사항을 넣어 Renovation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짖는 소리가 우렁찬 식빵 궁둥이 웰시코기 '탐이'는 내가 맡아주기로 했다. 딸은 아기 양육이 가능한 워라벨의 회사로 옮겼다. 대폭 낮아지는 급여를 감수하고 아기를 평화롭게 맞이하기 위해... 아침과 저녁 중 한 번은 하늘의 온전한 색깔을 볼 수 있게 근무시간 조절이 가능한 회사로.


집을 고치고도 예닐곱 번은 마무리가 안된 에어컨 설치, 싱크대 맞추기, 하수구와 전기 배선 오류 조정 등으로 인해, 출산차 병원에 입원한 딸 대신 나의 세 식구가 가서 기사들의 방문에 대기했다. 딸의 시부모님은 산모가 산후조리원에 머무는 동안 침대와 책상을 조립하고, 추가 설비로 어지럽혀진 집을 청소해주려 주말마다 들르셨다. 주말 비상근무도 잦은 젊은 부부는 일상의 흐트러짐이 생기면 그걸 채울 시간 조절이 어려워 결국 누군가 우렁각시들의 손이 필요하다. 딸과 사위네 우렁각시 노릇은 아직 현직에 계신 시부모님들이 시간을 조절하여 기꺼이 달려와서 해주신다. 두 분이 혹여 지방 출장 중이실 때는 친정으로 연락을 할 수밖에... 젊은이들의 워라벨은 훨씬 혹독한 수위이므로.


아마도 아기 양육은 직장과 병행하기가 어려워 엄두를 못 내는 대신 호젓함을 채우려 개를 키우면서 가끔 동물병원의 개 호텔에 맡기고 여행을 자주 다니며 행복하게 사는 삶을 고안했을 딸은 아기가 오면서 궤도수정이 불가피해졌다.


그리고 그지없이 어여쁜 아기의 이마와 머리에 입술을 자동으로 갖다 대면서도, 힘들 때면 시댁과 친정 어른들의 아기 노래 탓에 고단해졌다고 푸념을 해본다. 그렇게 큰 숨을 쉬곤 하나 보다.


운 좋게 참 따뜻한 마음의 아기 돌봄 전문가를 만나서 엄마의 출근 후 오후 8시까지 아기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솜씨도 좋은 그분은 아기 모자도 직접 만들어주어서 바느질 솜씨가 서툰 나는 고마움 가득이다. 안타깝게도 1년이 지나서 그분이 국민건강검진 결과에서 발견된 질병으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방사선 치료가 이어질 예정이라서 마무리 여행을 아기네와 함께 한 뒤에 병원에 입원했다. 아, 천만다행으로 다음에 인연이 된 아기 돌봄 전문가도 따뜻한 성품이어서 아기와 금세 상호작용을 통해 라포 (rapport) 형성이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치료 중에 문득 아기 생각이 날 때면 첫 번째의 아기 돌봄 전문가도 다녀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지 않은 아기 부모는 퇴근 후에도 아기 돌봄을 이어받아 9시 30분에 잠들 때까지 함께 하며 서서히 지쳐갔다. 남은 집안일들을 처리하고 회사일도 더 마무리한다. 아침에는 아기 취침 전에 일어나서 아기 음식들을 준비하고 자신들의 가벼운 아침을 해결하고 일터로 향하는... 집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택배로 받는 시스템 덕분에 쇼핑 시간이 줄어듬은 직장맘에게 도움이 크다. 전문성 있는 업무시간이 가장 좋다는, 젊지 않은 아기 부모에게 아기 양육은 기쁨, 보람과 함께 체력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고맙게도 아기는 마음 따뜻한 전문 도우미의 손길에서 잘 자라고, 병치레를 거의 하지 않아서 아기 엄마가 크던 시절의 병원 출입으로 인한 고단함은 생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강도가 센 아기 부모는 수면부족으로 늘 피로함이 얼굴에 얹혀 있다. 주말에는 시어른들이 자주 아기를 데려가셔서 두 부부가 주말에 낮잠도 자보고, 밀린 집안일도 하고, 지인들과의 약속이나 결혼식, 장례식 등에 참석할 수 도 있다.


다행히 양가가 서울에 거주하여 도움의 손길이 있음에도 아기 부모는 넘쳐나는 아기맘들 정보에서 취사선택하고, 지인들에게서 정보를 구하며, 늘 좋은 부모 노릇을 꿈꾸고 실천하느라 몸도 마음도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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