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그리고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입시 준비에 이어 여고시절에 공부를 할 때는 공부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행여 시험에 나왔을 때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몇 가지 미신 같은 수칙들을 지키곤 했다.
공부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시간에 입었던 옷은 될수록 바꾸지 않고 다음날에도 입고 가서 시험을 본다던가, 휴일엔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에서도 흰 교복에 까만 치마를 입은 채 공부한다던가, 정말 암기가 잘되는 찰나에는 엄마가 넣어주는 간식 노크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눈길도 주지 않고 거절한다든가, 화장실 가는 일도 한참을 참아본다던가, 시험 점수가 좋았던 때 사용한 연필은 신주모시듯 아껴 쓴다던가 하는 소소한 집착...
짧은 진학 준비에 비춰서 운 좋게 합격한 그 여고에는 워낙 열심인 아이들과 교육감 딸, 의과대학장 딸, 국회의원 딸, 기업체의 딸 등 을 포함하여 집안 좋은 수재들이 많은 틈에서 버겁지만 공부에도 체력장에도 제법 열심이었던 시절의 노하우는 평생 도움이 되었다.
오늘처럼 과외나 학원이 번성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니 재수생 대입 성공학원이던 종로학원, 대성학원이 명성을 떨치고, 공부를 좀 하는 재학생은 이동거리를 감안하면 학원보다는 개인 단과 과외를 경험하는것 외엔 본인의 복습열정이 중요했다.
물론 당시에도정통종합영어 과외와 수학 1, 11정석 과외는 2번씩 코스로 전체를 훑는다고도 했다. 주로 전기 남자고등학교 영.수과목의 남자교사들이 학교 명성 덕분에 새벽과 늦은밤 줄줄이 과외교사로 수입을 거두어들였다.
여유있는 가정에서는 가난한 수재 대학생의 입주과외가 유행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고 통금이 있던 시기이니, 과외할 형편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대체로 학교생활 위주였다.
고등학교 진학 자체가 어려워서 방직공장 취업이나 버스안내양, 좀 사는 집의 집안일을 돕는 가정부가 된 어린 여성들의 삶이 흔했던 시기이니 학교다닐 수 있는것만으로도 특혜였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열심히 공부를 했던 시기였다.
그 시기는 빈부차로 인한 교육격차가 지금처럼 확대되고 메스컴에서 매일 언급하는 상황은 아니어서 가난하지만 야무진 시골 출신 수재들도 적지 않았다. 과외가 없이 혼자 눈이 충혈되게 공부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을지도 ... 모르는것은 학교 교사의 열정적인 설명과 앞선 등수의 친구설명으로 해결되곤 했으니까.
내 뒷자리의 의대학장 딸은 도시락 반찬에 달걀말이와 소시지 반찬이었고 도시락을 열면 달걀프라이가 얹혀 있었다. 대부분 여고생의 반찬이 김치, 콩조림, 멸치볶음이었으니 도시락 반찬 비교로 보아도 그 시절 많은 이들이 선망하던 여고의 점심 도시락 반찬의 빈부 차이는 예민한 시기의 가슴으로도 견딜만했을게다.
물론 더 어려운 친구들은 점심 대신에 학교 매점에서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교정에서 사진을 찍고, 학교 앞 매점에서 군것질을 나누었다. 현재는 거주 국가들도 다양하고 직업과 사회적 위치도 다양하지만...
당시 오직 회사업무 제일주의로 사는것처럼 보이던 남편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렵고, 선배언니나 친구도 없는 타국에서 아이들의 첫번째 시기의 책 읽기 습관 키워주기를 담당한 겁많고 소심한 엄마에게 고등학교 시절까지 공부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부대끼며 경험한 시간들이 영양제가 되었다.
만으로 2년 3개월, 4년 4개월 연령의 어린아이들의 보호자로 뎅그마니 시작한 해외생활에서 아이들 교육을 위한 엄마로서의 매순간의 판단과 결정에 얼마나 요긴했던지.
그토록 암기가 어려웠던 물리, 화학, 생물, 지학, 그리고 국사, 세계사, 심지어 음악 미술에 이르기까지 초중고 시절의 지겨웠던 암기 공부들은 어린아이들의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도록 부추겨줄 수 있는 엄마의 노하우의 집성판이었다.
그래도 나의 못난 교사 노릇을 포함하여 학창 시절의 선생님들이 무조건 외우기를 강조하기보다 그게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양념으로 깨알처럼 알려주셨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도 생겼다. 즐겁고 맛있는 공부도 가능했으리라는 터무니없는 미련이 생기기도 했다. 적어도 고등학교까지 배운 내용들의 여러 과목은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적 자영분이고 생활의 지혜가 되므로.
요즘엔 어린아이들의 책 읽기를 장려하는 수많은 유·무료 프로그램들이 제공되고, 집 주변에 작은 도서관이나 독서실, 심지어 카페에서도 노트북을 켜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춰져 있지만, 짜장면과 군만두에 탕수육이 졸업식 기념 특별 메뉴였던 1970년대의 고등학교는 학교 도서관이나 교실에서의 공부가 집중력 최고의 공부였다.
일단 함께 모여 시험 준비를 하면서 서로의 연습지를 힐끔거리며 자신을 채근할 수 있으니 스스로 북돋는 역할이 되므로. 거기에 노천명의 '사슴'이나 박목월의 '나그네', 릴케의 '가을날 '암송은 덤으로 즐기는...
대학입시를 목표로 하는 전기고등학교 1)들은 교실에서조차도 조용히 걸어 다니고 조용히 공부했다.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들만 교실 천정을 날아다녔을 뿐.
대신, 공부하다가 머릴 식힐 겸 넓은 운동장 건너편에 뎅그러니 떨어져 있는 음악실에서는 마음껏 피아노도 칠 수 있고, 노래도 할 수 있고 운동장에서는 철봉에 매달리고 수류탄 던지기나 모래밭에서 멀리뛰기 등 체력장 연습을 끊임없이 병행할 수 있었다.
오래 달리기 800m는 4줄로 서서 한 반이 함께 달리니 체육시간에만 가능했고 독려차 담임이 함께 뛰기도 했다. 당시에는 아마도 대학 예비고사 (지금의 학력고사) 총점이 공부 320점에 체력장 점수 20점을 합해서 340점이었을게다.
그 시절까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준비한 중학교 입시로 시작해서 꽤 공부 강도가 세게 했던 경험은 교사 시절과 결혼 후까지도 시험공부가 제대로 안되어 속을 끓이는 꿈을 꾸게 했다. 마치 전방에서 병역을 마치느라 얼음 주먹밥과 악질적인 체벌을 자주 경험한 옆지기가 꾼다는 군대 시절의 악몽처럼...
물론 교사 시절에는 시험 출제를 다 못한 상태에서 시험일이 다가와서 당황하는 꿈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어쨌건 학창 시절 여러 과목 공부의 암기 기억은 부담스러움으로 압축된다.
설령 자주 열매가 달콤했다 하더라도... 어쩌다 전기고등학교에 덜컥 합격하고 이후 대학교와 교단으로 이어졌지만, 애당초 공부에 대한 특기는 없어서 빨리 끝나기를 기원했다. .
그런 와중에도 도서관에서 틈틈이 외우고 싶은 시를 베낀 시노트가 365일 가방에 자리하던...
산세베리아 꽃대 포기를 이리저리 살짝 밀어내어 꽃대 찾기를 반복하다가 포기하고 꽃대가 잘 자라도록, 산세베리아의 향기를 기대할 수 있게 만개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으니 간단해졌다.
그래, 평생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산세베리아 꽃을 베란다 모퉁이의 화분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데.... 2015년에 비하면 내일 (tomorrw)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눈을 뜨면서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스물네시간 칸칸마다 행복한 우리는 지금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을 숫자에 맞춰 찾겠다고 잠시 동안 고갤 기웃거렸던 거다.
행복을 상징하는 세 잎 클로버가 지천인데도, 행운을 의미한다고 알려진 네 잎 클로버를 코를 박고 찾아다닌다더니, 오늘 모녀는 초미니 덤불처럼 촘촘하게 자란 키 큰 산세베리아 잎줄기를 요리조리 밀며 저 아래 바닥에서 움터오는 꽃대를 찾느라 반복해서 아침의 귀한 시간을 허비했다.
공짜 서비스를 제공하니 계속 서비스를 바라더라는 장사하시는 분의 한탄처럼 산세베리아에 정성도 안 쏟고 공짜 서비스를 계속 요구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포함하여 온 가족의 평화를 뒤흔든 딸의 아픈 시간들까지를 포함한 과거가 부엽토가 되어서 오늘 열매를 맺는 중인 감사한 시간에 눈을 맞추지 않고, 잠시 시선을 멀리에 두고 행운을 찾던 아침결을 반성하며, 어깨 한쪽을 못쓰게 된 엄마의 수호자가 되기 시작한 큰 딸과 함께 논문 발표를 위해 KTX에 몸을 실었다.
각주 1). 전기 고등학교: 요즈음의 특목고처럼 1차로 시험을 봐서 학생을 뽑는 학교
후기 고등학교: 전기 불합격이나 개인 사정으로 2차로 다시 응시하는 학생들을 선발하는 학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