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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토마토의 양볼이 상기되었을 때

텃밭을 다녀간 라푼젤

by 윤혜경



*베란다에서 싹을 틔운 바질... 텃밭에도 뿌려두었으니 조만간 바질을 만날 수 있기를..



2주 만에 방치되던 텃밭이 걱정되어 온 가족이 나섰다. 세찬 빗줄기에 밭이 파여 지난번 얼핏 보이던 감자알도 내팽개쳐졌을까 봐 오늘 흙을 돋아줄 겸 들러보기로 하고, 보고 있던 원고 페이지를 닫았다. 2시간은 오고 가고 밭에 머무는 시간으로 떼어놓기로.


수도 한복판을 덮친 수재 뉴스가 너무 참혹해서 답답한 마음이었는데, 잠시 파란 하늘과 햇살까지 나오니 조금씩 어려운 정리가 가능할지... 사실 텃밭을 염려하는 엷은 마음조차도 상처투성이가 된 수해피해가정에 미안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잦은 비로 텃밭 물 주기는 건너뛰고 지내다가 사나운 빗물 줄기에 패어서 주인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을 밭작물을 향해 나섰다.


도착한 우리의 텃밭은 역시 예상대로 하늘 향해 곧게 뻗은 상추 꽃대와 맘대로 퍼진 당근 잎사귀들, 흙이 파여서 등을 내보인 감자알, 그리고 아무 대로나 줄기를 내어 감고 지나가는 오이와 가지 나무 서너 그루가 생존해 있다.


자주 가지 않고도 힐링에 도움을 주는 텃밭관리를 원했다면 고추나 고구마, 감자를 심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얻은 생각 한 그루.


밭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기다린다는 상추와 고수를 심었으니 작물선택에서 일단 실수를 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들의 밭작물이 눈에 들어오는 일 또한 행복하다. 부지런한 손길 순서로 작물의 생장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작은 모판 크기의 텃밭들을 지나며, 밭주인들의 텃밭 가꾸기 스타일을 읽을 수 있다.


이젠 고추의 시간인가 보다. 이웃 밭들엔 대부분 초록과 빨간 고추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우리 텃밭은 그중 꼴찌에 가까운 밭의 상태지만 곧추 자란 몇 개 남은 상추 대를 뽑아주고, 금세 터를 잡은 잡초들도 뽑아냈다. 신기하게 상추는 괜찮은데, 사이사이로 흩뿌린 열무의 잎은 온통 작은 구멍 투성이어서 아예 벌레에게 주는 편이 낫겠다.


오이 잎과 호박잎 구별이 어렵게 둘 다 손바닥 크기 이상으로 잎이 자라고 끊임없이 줄기를 만들어서 주변을 감고 기대니 겉모습만으로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곳에 숨다시피 매달린 작은 열매를 보아야 오이구나 할 수 있는 문외한이니 사실 더 많은 발걸음이 필요할 텐데...


노란 꽃이 나오는 걸 보면 뉴질랜드 단호박 씨앗이 섞여 심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단호박도 피망도 씨앗을 말려서 씨앗 상자에 넣어두었으니 작정하고 심지 않았어도 얼결에 섞여있을 지도.


몇 개의 씨앗이 싹을 터서 드디어 바질의 모습도 나타났다. 이제야 피망 싹도 틔워서 모종의 크기로 자라는 중이다. 늦게 심은 씨앗이니 가을날 피망이 겨우 멍울진 크기로 자라도 좋다. 생명의 움틈은 언제나 새로우니까...


그러고 보니 2주 전에 왔을 때 우리 밭의 한가운데에 심어둔 키 작은 방울토마토 모종 3개 틈에 우뚝 자란 큰 토마토 나무가 있었다. 그곳에 아기 주먹만 한 초록 토마토가 네 개나 달려 있었다. 작은 딸네 아기를 위한 시도인데 모처럼 성공했다. 무거울 테니 지지대를 세워 묶어주었었다.


아기 엄마인 작은 딸에게 주문을 받아 심은 종목이 딸기와 토마토인데, 딸기는 바닥에 닿은 상태에서 녹아버렸다. 실제로 딸기 모종이 딸기를 보여주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세 개나 심었는데 빨간 딸기 몇 알 보여주고는 지금은 줄기를 뻗쳐 영토를 넓히느라 바쁘다.


차선책으로 두 돌이 지나면서 의사 표현이 분명한 아기를 위해 감자와 초록 토마토를 보존하기로 했었다.


얼마 전 잠깐 들렀을 때 젖은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할머니랑 궁둥이 씻으러 갈까?"


물으니


"아기는 엄마랑 씻고 싶어요."


하고 오물대던 조그만 입술이 눈에 선하다.


오늘 발견한 밭 한가운데의 깊이 파인 구멍은 바로 그 토마토가 심어져 있던 자리이다. 누군가 토마토 나무를 통째 뽑아갔나 보다. 토마토 나무가 날아간 흔적도 없어서 두 모녀는


'밭에 토마토를 심은 적이 있었나? 착각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방울토마토는 신통하게 열매를 방울방울 열어서 순서대로 따 보았는데... 마음먹고 시간을 더 준 큰 토마토와는 이렇게 헤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는 큰딸에게

"타깃이 되면 방법이 없어." 하고 답했다.


봄에 심은 딸기모 중에서는 신통찮은 열매가 바닥에 닿아서 시들었고, 감자는 세찬 비가 헤집어서 늦게까지 땅에 머물게 한 보람이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다린 토마토 양 볼의 홍조는 구경도 못하고 타인에 의해서 막을 내렸다.


세 그루씩 골고루 심어두었으니 이번엔 오이와 가지도 마무리 중인데... 오늘 오이는 제법 크게 자란 한 개를 발견하고 따왔다. 다행이다.


도시에서 상자텃밭이나 구청 등에서 제공하는 텃밭농사는 경제적인 측면으로는 민망하지만, 정서치유 측면에서는 오이 나무에서 1개의 오이만 자라도 즐겁기 그지없다. 풀벌레 크기의 가녀린 열매가 갈 때마다 움트고 길어지는 모습이라니.


등을 보이는 몇 알의 감자도 더 이상 흙을 덮어주지 않고 캐어냈다. 귀하게 대기자로 당첨된 텃밭인데 밭주인이 즐거움만 앞세우니...


텃밭 신청 목적이었던 '2살 베기 손주를 위한 채소 자람 보여주기'가 일단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지금 아기네는 직장에서 따라온 코로나 19 전염균으로 돌봄 이모까지 온 가족이 코로나를 앓는 중이니 조만간에 텃밭 방문은 어려운 일이다.


밭에서 자라고 있는 토마토 한 그루가 꼭 필요한 '동화 속의 라푼젤'같은 사연을 지닌 이가 가져갔다면 다행이다. 그 사람에게도 정서안정이 되었기를.


아동용 동화에서는 임산부 아내의 간절한 식욕을 위해 남편이 마법사의 텃밭에서 상추를 몰래 뽑다가 들킨 벌로 태어날 아기를 마법사에게 건네주게 되고. 아기는 마법사가 지은 성에서 아가씨가 되어 평생 기른 긴 머리를 내려뜨려 왕자와 탈출을 시도한다는 동화.


아기 주먹만 하게 자란 텃밭 토마토 알을 훔쳐간 일이 태중의 아기를 위함이라면 더욱 좋겠다.


원두막 참외서리처럼 과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우리 텃밭 통틀어 총 네 알 뿐인걸... 그걸 눈독 들여 나무째 뽑아가다니...


마음을 토닥여보지만 그래도 서운하다. 토마토 나무에 튼실하게 매달려 있던 초록 토마토 네 알의 양볼에 홍조가 들기 시작했을 텐데, 조금 더 놓아두자 주장했던 내 탓이오, 내 탓이로소이다.


아기와 아기 엄마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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