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팔자에 없는 연구자가 되고
이제 나는 꼼짝없이 글 읽는 일에 사로잡혀 인생 내리막길의 취미와 특기를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형국이다. 5년여를 동물응응과학 분야인 동물매개심리치료 연구에 빠져서 그동안 해외 동물매개중재 관련 기관들의 자료들을 예상보다 훨씬 많이 모으게 되었다.
동물매개중재는 1990년도부터 미국과 영국을 비롯하여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여러 국가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이미 활발한 연구와 실행이 이루어져 왔다. 그중 1999년에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개발된 학교와 도서관에서의 읽기도우미견 프로그램 즉 <리딩독 프로그램>은 벌써 20년이 넘는 역사임에도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한 분야이다.
일찍이 학교가 재미없는, 특히 학습의욕을 상실한 저학년 아동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내고, 학교 출석을 격려할 수 있도록 개발된 개의 도움을 받은 읽기 (Canine-Assisted Reading)인 '아동이 훈련된 읽기도우미견에게 소리 내어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 (Children Reading to a Dog Program)은 특히 저소득층 가정의 자녀와 이민가정 자녀의 교육문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전국적으로 실행 중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국가들에서도 활발하게 실행되고 있다. 가장 활발하게 <읽기도우미견프로그램>이 실행되어 온 미국의 대표 기관들의 닮은 듯 다른 리딩독 프로그램 내용과 운영 방법, 그리고 비영리기관 운영방식은 국내에서도 참고해서 운영할 수 있도록 견학과 연구가 필요하다.
학위논문을 끝내고 나서 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많은 자료들 덕분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료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분리하고 이들을 관련 이론과 실행을 위한 연구자들의 자료가 될 수 있게 번역 작업이 필요하다.
동물매개치료(AAT)와 함께 동물매개교육(AAE)에서 다루고 있는 생명존중 교육과 읽기도우미견 프로그램(AAR )을 보다 적극적으로 교육 관련 기관에 소개하는 일 또한 해야 할 일이다. 딸과 함께 곧바로 대학교재용 원고 작업에 빠졌다. 예상보다 오래 걸렸지만 초고를 완성하게 되었다. 1+ 1 작업의 보람을 듬뿍 느끼며~.
서른 살이 넘은 큰 딸의 가벼운, 아주 가벼운 수술이라던 갑상샘 전절제가 부갑상샘의 전체 제거와 함께 예기치 못했던 수술 후유증으로 이어지며, 엄마에겐 아직 없는 심장질환부터 신장, 혈관, 뇌신경 관련 질병들을 품게 되었었다. 8년째인 현재, 딸은 30대 후반에 이르고, 하루에 20알 가까운 약을 복용하며 몸의 협조를 구하는 중이다. 그동안 주 1회 새벽에 나서는 모녀의 세끼 도시락을 준비해 준 남편 덕분에 딸과 나는 밖에서 사 먹는 음식에 데면데면하다.
"아빠의 초밥이 제일 맛있어."
"아빠의 감잣국은 참 부드러워."
"아빠의 스테이크는 정말 최고야."
는 남편을 부엌에서 춤추게 만든다.
아빠의 음식에 감탄하는 큰 딸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이제 집안 청소와 빨래 널고 개키기, 설거지는 큰 딸이 자주 봉사 중이다. 너무 많은 약 복용으로 인해서 신장에 쌓이는 칼슘 찌꺼기 등의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칼슘섭취 관련 약들을 더 이상 줄이기는 난감한 상황이라고 들었다.
이미 9.0을 맞추다 여러 번 급성신부전으로 이어져 입원치료를 해야 했으므로, 현재는 8.0 언저리에서 칼슘수치가 머물게 조절되는 모양새이다. 칼슘이 자주 7.0대에 머물면서 손톱이 지속적으로 찢어져 나가는 불편함이 이어진다. 가슴이 조이거나 내 눈에 이상증세가 포착되면 동네내과에 혈액검사를 의뢰한다.
어김없이 7.0 언저리의 저칼슘혈증으로 판단된다. 그럴 땐 2개월마다 이어지는 다음 정기외래까지 중간중간 칼슘과 비타민 D를 추가섭취하며 기다린다 , 신장내과와 피부과 닥터의 조언대로 가끔 매니큐어 닮은 손톱보호제를 발라서 조금은 견딜 수 있게 노력 중이다. 아주 오랫동안 모양내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딸이 투명매니큐어를 바르곤 하는 모습도 예쁘다. 어느 날엔 하늘빛 매니큐어가 새끼손톱에 살짝 발라져서 반가웠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가는 걸로 ~.
현재는 건강해지고 있으니 그동안 병원에서의 시행착오를 충분히 알고 계시는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잘 지켜보시리라 기대하고 마음을 가볍게 하기. 토닥토닥...
딸의 일상생활 회복은 내게 지난 시간이 가끔 꿈처럼 가볍고 아스라이 여겨질 지경이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딸이 안보이거나 움직임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 엄마인 나의 소심한 공포가 금세 피어오른다.
그래도 씩씩하게... 이 시간을 위해 당사자와 부모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쏟아졌던가를 잊지 말고 감사하며 오늘, 지금 행복하기이다.
우리 둘의 여정에 동반했던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입양견 '수리'는 두 여자가 논문에 빠져서 학교 동물매개치료활동에 나가지 못하고 아침저녁밥만 챙겨주는 동안 일곱 살이 되었다.
말티스 '수리' 방식의 시위로 배변패드가 놓아진 장소 외에 안방과 거실의 욕실 메트 위에 소변을 보는 일도 생겼다. 심지어 시드니에서 구입하여 안방 침대 옆에 쌓아둔 내 모자상자들에도 발을 들어 올려 소변을 뿌렸다. 괘씸하지만 생명체인 수리가 훨씬 소중하니 눈만 흘기는 걸로.
요즘 약한 분리불안 중세도 보이고, 식탐이 다시 늘고, 음식쓰레기통과 휴지통 엎어뜨리기에서 점점 사고 치는 방식이 다양해지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나 누나가 간식을 손에 쥐고 일어서면 금세 영특한 눈빛을 초롱거리며 단정하게 앉아서 보여줄 묘기를 궁리한다.
* * *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처음엔 스스로 상황 직시가 어려워 비켜서서 입양견인 수리의 시선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제 1인칭 시점이 가능해졌습니다.
마음속에 담긴 체증들을 못 이겨 퇴고도 못한 채 브런치에 올렸음에도 읽어주신 여러분들 덕분에 마음 정리가 가능하여 졸업 논문을 쓸 수 있었습니다. 환자인 큰 딸의 보호자로 계속 여러 과의 진료를 위해 대학병원을 함께 다니는 중이어서 시간과 체력 소모가 많습니다. 기한에 쫓겨 논문 정리가 급한데도 마음속에 가득 담긴 속상함을 내뿜지 않고는 단 한 페이지도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딸과 함께 병원을 다녀오는 날이면 새삼 생각이 많아져서 자주 일기처럼 글을 올리게 됩니다.
중언부언 중인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수리의 데모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