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매개심리치료견으로 <읽기 도우미견> 활동에 참여하는 '수리' 임무도 <행복 나르기>이다.
앞글을 퇴고 중 너무 길어져서 나누어 올립니다. 먼저 방문해 주신 분들께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노후에 궁둥이를 잘 닦아줄 자식 알아보기
생전에 가벼운 배낭차림으로 등산을 즐기셨던 시아버님은 60대에 위의 일부를 절제하신 후 건강관리를 잘하신 편이었으나, 말년에는 오랜 당뇨와 뇌졸중으로 몸의 반쪽이 마비되어 앉고 서는데 도움이 필요했다. 위를 절제하시고도 그에 따른 어려움을 얘기하신 적이 없어서 어머님의 정성 가득한 수발뿐 정작 직장생활에 메인 자식들은 주말에는 쉬느라 둔감했다.
외모가 세 아들보다도 늠름하고 멋지셨던 180cm 신장의 아버님과 손맛이 특별하고 피부가 참 고우신 시어머님은 아들만 삼 형제를 두셨다. 두 분에게는 아버님과 마음 박자가 빗맞는 큰아들이나, 아내 눈치를 먼저 보는 신사 같은 둘째 아들보다는 실직자이지만, 해외에 있는 아내의 노력에 동참하지 않고, 고령의 부모님 옆에서 밀착하여 지낸 막내아들이 편하셨을게다.
아버님처럼 공대를 나와 건설회사를 다니던 막내아들이 현장사고 무마 비용이 꽤 커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했다며 시어머니는 속을 끓이셨다. 첫째나 둘째와 달리 셋째 아들네의 크고 작은 일은 부부가 번갈아 부모님께 보고를 하여 쌀알 세듯이 꿰고 계셨다.
이후 조기퇴직 후 집에 머문다는 소식에 처음엔 마음이 편치 않아 하셨다. 부모님 기준으로 가장노릇이 시원치 않게 된 막내아들로 인해 처음에는 막내며느리 눈치도 좀 보셨다.
그전엔 명절이면 첫째와 둘째 아들이 드린 적은 액수의 용돈 봉투마저도 공사현장인 창원에서 올라온 막내아들 손에 슬쩍 쥐어주시며 등을 도닥이곤 하셨다. 심지어 막내아들이 좋아하는 달콤 짭짤한 밑반찬과 과자들을 준비해서 손에 들고 대중교통으로 서울 고속 터미널에서 그의 주거지가 있는 대전까지 다녀오시곤 했다.
일단 손 위의 두 형들은 서울에서 자기 가족을 위한 가장 노릇을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니, 직장에 다닐 때도 막내아들은 노부모님의 아픈 손가락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들이 직장이 있던 대전에 집을 마련하여서 형들과 달리 서울에 집이 없다는 이유였다.
2001년 초 아버님의 큰아들은 석사학위를 마무리 중인 아내와 10대 두 딸들을 해외에 둔 채 발령받아 혼자 귀국했다. 세입자의 전세만료 기간이 몇 개월 남은 동안 아버님의 큰아들은 아버님댁에서 머물며 출퇴근을 했다. 이후 아버님의 작은 손녀가 고교입학을 위해 귀국했다. 하여 아버님의 큰아들네는 부녀가 아버님댁에서 기거하며 어머님의 난데없는 `새벽밥 짓기`가 세입자 계약만료까지 일 년여나 이어졌었다.
아버님의 <앉고 서기>가 불편하신데도 두 분은 함께 첫째 아들의 작은 아이(아버님의 손녀)가 아버님의 오랜 소원이었던, '모교의 후배가 되었음'을 마음 가득 축하하시며 대학 입학식에 참석하셨다. 그날 대학로의 옛 캠퍼스 자리를 설명하시며 청년 시절의 기억을 소환하셨다. 작은 아이의 대학입학식 참석 후 지하철역 부근의 전문 식당에서 가족 식사를 하시며 참으로 즐거워하셨었다.
시어머님은 금으로 만든 커다란 <행운의 열쇠>를 작은 아이에게 선물해 주셨다. 손자손녀가 6명이니 오늘 같은 연금수입도 없는 시대에 부담이 적지 않으셨다. 두 분의 축하와 기뻐하시는 모습 덕분에 당시에는 나도 모처럼 뭔가를 잘한 것처럼 생각이 들었었다. 행운의 열쇠가 어머님께 얼마나 무거웠을까를 이제야 실감하다니... 자식은 늘 여러 박자가 늦다.
은행에 큰 아이 것과 함께 맡겨두었던 그 행운의 열쇠는 작은 딸의 아기 돌잔치 때 아기 선물과 함께 건넸다. 이제는 작은 딸의 안방에 잠금장치가 없어 부담스럽다고 해도 건망증이 증가하는 나보다는 자기 집 주변의 안전한 은행 금고에 맡기도록.
2002년 2월 귀국한 큰며느리와 함께 큰아들네가 아파트 renovation을 해서 안착했다. 얼마 후 막내아들의 부모님 아파트 발걸음이 잦아졌다. 그러다가 어머님의 막내아들이 재취업을 준비하는 모양을 보이는 듯하며, 아예 서울의 부모님 집에 머물기로 했다고 들었다. 큰아들과 다른 점은 일단 회사출근이 없으니 막내아들을 위한 별도의 새벽밥 지어먹기 건은 없었다.
그래도 시어머님의 기상은 늘 새벽 동틀무렵인 5시였다. 세수와 옷 단장 후 먼지떨이, 빗자루, 걸레를 이용해서 거실과 부엌 청소를 먼저 하시고 정갈한 환경에서 쌀을 솥에 안치신다. 그리고 찌게재료를 냄비에 담아 불을 올리고 각 방의 잠자리들이 개어지는 시간이 되면 방 청소까지 마무리하셨다.
보통은 시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은 전기면도기를 들고 일어서서 어머니의 노동 동선확보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느라 방과 거실로 이동한다. 180cm 위아래의 키 큰 아들들은 젊은 시절 160cm에 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키가 줄고 가녀린 체형의 어머니의 청소도구를 받아서 직접 청소를 맡기도 한다. 모였을 때 일상은 그랬다.
그동안 어머님의 막내며느리는 당시 붐이 일던 중국유학에 대전에서 '맘 모임'을 통해 영특한 둘째 아들을 동참시켰다. 의사소통에 필수인 중국어나 영어 준비도 없이 슈퍼슈퍼맘이 되어 아들의 중국유학 현지로 함께 가서 하숙집을 운영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참으로 열심인 그녀의 노동은 <타고난 한국엄마의 자녀교육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터무니없이 용감하고 감동적이다.
이후 어머님의 막내며느리는 한국에서의 진학이 쉽지 않은 두 아들과 미국으로 갔다. 학부모로서의 체제 비자가 마땅지 않아 아들만 남기고 보호자는 중도 귀국을 했다 그리고 시어머님의 막내아들 부부는 자신들 살림살이를 처분하고 빈손으로 어머님 댁으로 들어왔다. 어머님은 막내며느리 눈치가 보이셨지만 막내아들의 취업을 독촉하지 않은 채, 점점 평정을 찾아서 옆에서 재잘대는 막내아들과 시장을 보고, 아버님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즐거움을 누리셨다.
슈퍼맘이었던 막내며느리만 귀국 후 업종을 가리지 않고 국내 취업을 하여 의료보험의 가족대표주자가 되었다.집에서 간식을 즐기며 어머니의 말 상대로 하루를 채우는 막내아들과의 시간들을 보내는 부모입장에서는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은 세월이 지나며 점점 무뎌졌다.
심지어 어쨌든 며느리인 내게 '아들의 부모인 내가 서울 주거지를 제공하고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으니 내 아들이 기가 죽을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을 전하시는 두 분은 오히려 막내며느리의 잔짜증이 `가당치 않음도 살포시 전하셨다.
그렇게 시부모님의 노후는 막내아들과 함께 의식주를 같이 하시며 우리의 처음 예상과 달리 조금씩 행복해지셨다. 어머님의 막내아들 내외의 잦은 다툼에 대한 불쾌하심을 가끔 듣게 된 나는 행간에서 '노부모님의 막내아들과의 자주 행복한 생활'을 읽어낸 덕분에 내 큰딸의 보호자 노릇에 전념하였다. 그렇더라도 돌아온 막내아들과 종일 그리고 매일 함께 하는 시부모님의 숨겨진 즐거움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님 막내아들의 두 아들 즉 어머님의 두 손자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기까지 막내아들 내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노부모님은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용조용히 아파트를 담보로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두 손주의 학비 지원을 하셨다. 어머님의 성품이 착한 손주들은 잘 자라서 시민권자로 미국에 안착했다. 금융기관에 다니며 교포와 가정을 꾸린 형제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자신들의 부모가 힘들게 뒷바라지했음에 감사해한다.
서울로 데려와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들고 싶은 고운 심성의 아들들을 미국에 뺏겼다. 시부모님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 딸만 둘이어서 막내아들네의 두 아들에 은근히 든든하셨을게다. 드러내놓고 차별은 안 하셨어도 1930년대생이신데 아들 선호가 어찌 없겠는가?
큰아들의 큰딸이 겨우 중학생 시절에 야리야리한 내 첫째에게
"이 아파트는 널 주마." 하셨다. 당황한 큰딸 대신 엄마인 내가 손사래를 치며
"저희가 도움드린 것도 없으니 충분히 쓰세요." 했었다. 진심이었다.
막내아들을 멀리 장가보냈다가 되찾아온 느낌을 즐기시던 시어머님은 막내아들이 집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 큰며느리 내외 앞에서는 불편을 호소하시며 흉을 보시는 척했다. 실제로는 막내아들의 입맛에 맞는 밑반찬 준비를 위해 건강한 장년인 막내아들과 함께 가는 시장길의 즐거움과 편리함에 점점 적응하시며 행복 냄새를 폴폴 피웠다.
세 번째 귀국 후 나는 시부모님(내겐 시조부모님)의 임종까지 맡으시고, 명절을 챙겨 오신 큰며느리로 노쇠해지신 시어머니의 명절 수고를 덜고자 두 딸과 남편의 손을 빌어 우리 집에서명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부모님은 촛대와 쌀이 담겨있는 향 단지, 그리고 달콤한 차례용 떡을 준비해 오셨다.
전통적인 제사 스타일보다는 약간 호텔식 상차림으로 어머님의 명절 메뉴와 살짝 다르게 시도했다. 당황하셨을 어머님의 깊은 손맛에는 어림도 없었다. 대신, 시드니의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맛본 이태리식 매작과를 만들어 물엿대신 하얀 슈거파우더를 뿌리고, 전통 찹쌀유과 등을 곁들이고, 다섯 가지 냉채, 흰 빵과 부추잡채, 유산슬 등으로 장식한 큰 접시들을 가운데 놓는 방식으로. 명절이 오면 '이번엔 무슨 메뉴를 할 끼? 뭘 먹고 싶은지?'를 가족들과 의논하는 즐거움도 좋았다.
사실 라면도 안 끓여본 솜씨로 결혼해서 2.5세와 4.5세의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시작된, 손님초대가 많았던 해외생활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손님초대용 8인조 영국 그릇세트만 사놓고 정작 요리에는 좌충우돌이었다. 5년이 지나고 귀국 후 짬짬이 학원에서 한식조리사와 제빵사 자격증과정을 배웠다.
그리고 두 번째 해외발령을 받아 이주했다. 내가 한국에 4년 거주하는 동안 해외주재원 생활은 금세 분위기가 바뀌어서 집 초대는 거의 없고 식당 초대로 다 해결되었다. 심지어 나의 집 초대에도 상대는 식당초대로 답례를 하곤 했다. 같이 즐길 수 있으니 식당초대는 형식이 배제된 실속 있는 방법으로 보였다. 비용면에서도 요리 가짓수를 사람 숫자에 맞춰 늘리느라 기본 재료가격이 높으니 2~3일에 걸친 시장보기와 준비 등의 노동시간까지 더해지면 차라리 식당초대가 더 경제적이기도 했다.
어쨌건 서울에서 요리 학원을 들락거린 덕분에 시부모님께서는 '맛있다'라고 칭찬하셨지만, 속으로는 '차례상인데, 양반집안이라더니 탕도 없고... 이놈이 참 상놈이군' 하셨을지도.
아침 일찍 모시러 가던 큰 아들인 내 남편의 수고가 어느 날부턴가 덜어졌다. 대신 막내아들이 운전하는 작은 차를 타고 오셨다. 시부모님의 의중을 모른 채 7년 동안 그리했다.
시부모님은 그렇게 막내와 함께 노후의 행복을 경험하시며 신체가 못 움직이게 될 노후를 주부가 되는 중인 막내아들에게 맡겨서 당신의 인지능력 상실 이후까지 아들의 손길을 기대하셨었나 보다. 처음엔 차로 50여분 거리의 은퇴한 큰 아들을 불러들이시던 종합병원에의 동행도 막내아들과의 동행으로 바뀌더니 시아버님의 병원 동행과 마지막 수발도 같은 주소지의 시어머님과 막내아들이 담당했다.
그리고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시어머님은 치매가 오기 전까지 막내아들에게 점점 부엌일을 전수시키시며 행복하게 지내셨다. 덕분에 고령에도 밝은 웃음이 많아지셨다. 그리고 마지막은 일 년여에 걸쳐 치매가 서서히 진행되고 신체의 쇠락기인 몇 개월 동안 막내아들의 대소변 뒷바라지를 받으시고 떠나셨다.
여전히 직장생활을 이어온 부지런한 막내동서는 어머님의 막내아들이 배변조절이 안 되는, 누워계신 어머니를 씻기고 배변 처리를 하면서 "냄새도 별로 안나." 했다며 놀라워했다. 어머님의 딸처럼 어머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곤 하던 둘째 아들은 중국지사에서 귀국하여 은퇴 후 월 1회는 부모님을 뵈러 와서 막냇동생을 거들었다. 자신도 아내를 이미 암으로 떠나보낸 뒤이다.
시어머님은 인지하지 못하는 시기의 당신 궁둥이를 물로 잘 닦아낼 막내아들의 정성을 일찍이 알아보셨나 보다. 궂은일 앞에 몸을 사리지 않는 어머님의 큰 아들도 잘했을 것 같긴 하다.
*시어머님의 손만두 만들기를 시도 중인 어머님의 큰아들과 큰 손녀.
돌아보면 사전 연락도 없이 방문하는 큰아들("엄마 보러 가는데 어때?" 하던 아들스러운 돌출행동은 내 입장에선 무례하고, 당황스럽고, 죄송하기 그지없다.)을 위해 어머니냉장고의 소소한 재료로 금세 맛이 깊은 '밥도둑 찌개'를 만들어내시곤 하던 시어머님은 말년의 외로움을 거두고자 가장 늦게 독립해서 가정을 이루었던 막내아들을 선택하신 게 노후 준비셨나 보다. 그리고 일 년에 두어 번은 어머님 만두를 좋아하는 큰손녀를 위해 아이주먹보다 큰 왕만두를 빚어서 보내주시곤 하셨다. 숫자개념이 빈약한 내게 전화로
"이번에 오래 먹으라고 <50개> 만들어서 보낸다. "
라고 하셔서 만두를 만드시면서 숫자에 대한 생각이 있으심을 알았다. 왕만두를 50개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가 담아졌을지를 짐작도 할 수 없다. 나는 만두처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음식 만들기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제 보니 남편과 큰 아이는 30개를 만드는데도 힘들어 보인다. 어머니는 80대에도 만두먹성이 좋은 세 아들들을 위해 만두피부터 반죽하여 밀어서 왕만두를 잘 만드셨다.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는 큰아들네가 서울에 귀국하여 사는 동안마다 맛깔스러운 겨울김치를 막내아들과 같이 담가서 보내주시곤 했다. 나도 결혼초부터 곧잘 1~2 포기의 김치를 담가먹는다. "이젠 아니라고 말씀드려요." 해도 옆지기는 늙으신 어머님의 전화를 받고 가서 저녁까지 먹고 김치통을 들고 오곤 했다.
곁에 있는 자식 덕분에
서른을 넘기고도 나빠진 건강 관리로 독립이 어려워진 큰 딸과 예정에 없이 오래 함께 살면서 문득문득 노부모님의 말년을 생각해내곤 한다. 내 큰딸은 미혼으로 30대 초반에 유명 대학병원에서 간단한 작은 암 제거수술을 받은 후 수술집도의의 <수술이 아주 잘 되었다>는 표현과 달리 제거하지 말았어야 할 기관(?)이 함께 상실되며 오히려 다양한 병명이 추가되었다. 큰 딸은 건강 악화로 독립은커녕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일상이 환자 역할로 채워졌다. 그 덕에 50대에 시작된 환자보호자 노릇으로 8년여 동안 우리 부부는 정신이 나갈 만큼 바짝 긴장해서 늙을 여유도 없었다.
이제 내 곁에서 맛있는 것 나누어 먹고 내 움직임이 힘들 때 우렁각시처럼 조용히 손길을 내어주는 자식이 있으니 건강이 약한 딸이라도 참 고맙다. 더구나 건강이 긍정적으로 개선되고 있으니 더욱 고맙다. 남편과 나는 노동을 할 수 있는 흙밭 한 평도 없는 아파트에 사는 중이니 꼼짝없이 각자 책 읽고 음악 들으며, 신문과 tv로 바깥뉴스를 듣고, 여행이나 간간히 다니며 지출만으로 건강한 기간의 노후를 채울 뻔했다.
아픈 딸 덕분에 입양한, 분리불안이 치명적이던 <유기견>은 이제 예쁜 반려견이 되어 '약방의 감초'처럼 안 끼는 데가 없다. 그리하여 동물매개치료견이 된 유기견 '수리'와 고마운 늙은 청년기의 딸과 우리 부부는 환하게 잘 지낸다. 딸 덕분에 향긋하고 즐거운 시간들로 이어진다. 사소한 말에 눈물이 나게 웃는 일도 딸 덕분에 생긴다. 함께 학술지 찾고 읽으며 자료정리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힘찬 경제활동을 좀 못하면 어떤가? 스트레스로 망가졌던 건강이 회복 중인데..' 그러다가도 갑자기 늙은 내가 '나 행복하자'라고 젊은 아이의 미래를 붙들고 있는 건가 싶어서 내지른다.
"너만 아프니? 그래도 너는 고맙게 회복되고 있잖니. 신장 투석을 하면서도 직장 생활하는 사람 많아. 이제는 독립준비를 해야지."
아픈 표현까지 동원하며 딸을 밀어내고자 독한 마음을 먹어본다. 또 한편으로는 뉴스에서 고단한 사회로 인한 아까운 젊은이들의 마음 아픈 사건사고 소식들을 들으며 마음을 다독인다. 더구나 잦은 119 도움으로 응급실과 병원 입원을 하며 병실과 각종 검사실이 내 안방처럼 편안하던 시간들을 돌아보면, 스무 알 정도의 약으로 매일의 신체리듬을 조절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가.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이고 서울은 국내에서도 치명적 꼴찌여서 출산율 감소 정도가 아니고 대한민국이 소멸될 위험이라는 데도 내리막 길의 부모입장인 나와 남편의 친구들은 결혼을 미루고 옆에서 예쁘게 함께 지내는 30대의 딸과 아들 덕분에 '걱정 반 행복 반'이라고들 한다.
'이를 어쩌지?'그동안 교육, 취업, 결혼, 분가로 이어지던 삶의 패턴에 미련을 거두고, 곁에 있는 자식과 함께 가는 나의 평화로운 노후준비를 진지하게 검토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