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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요" 메시지의 마법

넘 행복해서 기절

by 윤혜경

*가끔 목마르지 않게 물만 뿌려준 산세베리아에서 꽃대가 올라왔어요. 고마움, 그리고 분갈이도 못 한채 커피가루와 작은 영양제만 꽂아주며 수년을 견디게 방치한 데 대한 미안함이 함께 떠오릅니다.



무례한 <여유 없음>


오늘은 작은 딸의 유아를 픽업해서 역삼동의 'ㅊ병원 소아청소년과'에 재진 가는 날이다.


문진과 청진으로 처방해 주는 아이집 앞 소아과에 다니는 중에도, 만 3세 아이가 얻어온 감기는 이미 더 심해져 있다.


지난주 화요일에 내 업무가 많아 아이 집에만 머물 수 없어 내 집으로 아이를 데려와 옆지기와 큰딸의 도움을 받으며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옆지기의 차로 편하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냉장고에 보관한 아이 약을 깜박 잊고, 식탁 위의 약만 들고 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곧바로 당일 저녁때 방문한 내 집 앞 소아과는 열이 37.5도 된 어린아이의 진찰실 출입을 금한 채, 동행 보호자 설명을 바탕으로 새로운 처방전을 냈다.


기존 처방약을 알려주었음에도. 소아과 의사는 '다시 유행하는 코로나 예방 차원'이라고 무시했다. 병원을 나와서 그 처방전은 폐기했다. 쓸데없는 방문으로 시간과 비용만 허비한 셈이다.


결국 큰딸이 밤에 작은 딸 집에 가서 냉장고의 약을 들고 왔다. 내 건망증 탓에 큰 딸이 추가로 3시간을 길에 쏟았다.


일주일이 넘게 고열과 기침, 콧물에 구토까지 박자를 맞춰서 호흡하기 힘들게 기침을 하는 아이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자다가 시작된 아이의 거친 기침은 수차례 구토로 이어지곤 했다. 나는 토사물이 어린아이의 호흡기로 들어가지 않게 아예 곧추세워 안아 재우며, 앉은 채 꾸벅거리면서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해외출장에서 막 귀국하여 시차운운할 사이도 없이, 사위와 아이보호자 자리를 교대해서 아픈 아이의 병원 예약과 2차 병원 방문 문제로 직장맘 작은 딸은 생각이 많다. TV 드라마에서 본 고달픈 직장맘 상황 그대로다.


아이엄마가 주말에 귀국하자마자 월요일 새벽에 아이아빠가 출국했다. 결혼 후 8년 만에 마음을 바꿔서 얻은 아이 양육은 한창 일할 나이의 직장인 부부를 자주 망연하게 한다.


다음 날 나와 방문한 역삼동 ㅊ병원에서는 아이의 폐와 코 X레이를 촬영했다, 그리고 염려했던 대로 중이염, 부비동염, 비염에 이어 기관지염을 거쳐서 그예 '폐렴 초기'로 진단되었다.


어린이집을 다니면서부터 아이는 한 주 걸러 감기, 기관지염, 중이염 등 주로 호흡기 질환을 묻혀온다. '면역 생성 중 연령'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이를 지켜보는 아이의 부모입장에선 유아기의 잦은 병치레는 다소 긴장되는 일일터이다. 아이부모는 겉으로는 의연한 척한다.


그리고 5일간 약복용 후인 오늘은 아이 엄마가 갈 수 있게 오후 시간으로 예약한 재진일이다. 아이엄마는 아침부터 종일 중요한 회의가 있단다. 별수 없이 외할머니인 내가 일정을 조절해서 오후의 '병원 동행'을 맡기로.


아침 8시가 채 안되어 지선버스를 타고 7호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승용차로 출발해 보이 고속버스터미널 부근의 정체로 지하철보다는 느릴 것이 뻔하므로.


역삼동 ㅊ병원 예약 시간이 오후 3시이므로 오전은 내가 돌보고, 옆지기는 아이에게 필요한 유아용 Car seat가 장착된 승용차를 끌고 병원예약 시간 30분 전까지 작은 딸의 집에 도착하기로 했다.


오늘 아침에 작은딸 네로 가기 위해 탄 버스가 지하철 역 근방의 버스정류장에 가까워지는 동안 지선버스 뒷좌석의 몸집이 큰 40대쯤 돼 보이는 여성이 먼저 일어서서 버스 내림문 쪽으로 향했다. 내 좌석은 그녀가 서있는 지점의 바로 앞이다.


하여 내가 일어서서 바짝 다가선 그녀 앞으로 몸을 디미는 순간, 그 여자는 배를 내밀어 통로를 내어줄 생각이 없음을 내게 전달하며 짜증을 내었다. 짜증을 전달받은 나는 무례한 그 여자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여자의 뒤에 섰다.


지하철역 버스정류장에 차가 멈추고, 그 여자의 차례가 되어 내민 교통카드는 삑삑 소리를 내며 거절당했다. 바쁜 출근길에 뒤에 나오던 사람들이 그 여자의 교통카드가 제대로 작동되기를 멈춰 서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건너편 단말기에 카드를 댄 뒤, 그 여자보다 먼저 내렸다.


반 발짝의 여유도 못 갖춘 그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출근길을 여러 발자욱동안 세워서 역으로 달려가려는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단말기패스 지체' 문제이지만, 그 여자의 <무례함>은 아침 출근시간에 언짢음을 유발했다.


아무리 <에스컬레이터에서 걷거나 뛰지 마세요>를 시선 바로 앞과 옆 벽에 크게 붙여두어도, 가끔은 1인용 계단으로 이루어진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뒷사람이 빠르게 추월하고자 비집고 들어서는 때가 있다.


Moving walk와 2인용 계단의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으레 걷기를 멈추지 않는 행렬이 이어진다. 횡단보도 앞이나 코너에서 느리게 길을 건너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나 어린 학생들이 안전하게 보행도로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는 날엔 뒤차의 '경적소리'를 피할 수 없다.


가끔은 '내가 혼자만 느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황당하다. '수 초 후의 인생'도 짐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몇 초 더 빠르게 이동해서 어쩌겠다는 건지...


'자동차 차선 바꿈'이나 '추월 문제'로 뒷 트렁크의 야구방망이까지 등장하는 다툼으로 번진다는 기사를 접할 때면, 몽상처럼 공익광고를 이용한 <여유로운 매너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우린 <부가가치세>의 느닷없는 신설 때도, <쓰레기 분리수거>도 일단 시도하면 저항 없이 금세 잘 순응하는 국민인데도 불구하고, <잠깐 느림>은 좀처럼 수용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행복한 공기


아침 출발에서 겪은 불쾌함은 기분을 가라앉게 했지만, 오늘 가장 중요한 일인 유아와의 병원내원은 즐거워야 했다.


지난주 병원 첫 방문에서의 병원스텝들의 친절함을 떠올리며, 어쨌건 오늘 아이와 방문할 병원에서 적어도 아이가 당황하지 않게 병원스텝들과의 대면 시간이 부드럽기를 바란다.


반포역에서 내려 지상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침 8시 30분에 나 혼자 타서 문이 거의 닫혔는데, 저만치 서둘러 걸음이 빨라진 어르신이 보였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서 곧 포기하는 어르신을 위해 나는 < 문 열림> 버튼을 눌러서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게 하고 기다렸다. 오늘 나는 더 <여유 있기>로.


서둘러 들어오신 그분은 고개를 숙여

"감사합니다"

를 두 번이나 표현하셨다.


"아닙니다. 천천히 오셔요. 마침 문이 덜 닫혀서요."


열린 채인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닫히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주고받았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오래 기다리시게 되네요."

"아닙니다. 급하지 않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지상으로 내리면서 서로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했다. 순간 지선 버스에서의 그 무례한 여자로 인한 '불편한 마음'이 점점 옅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너무 여유 없고 아무 데서나 무례한 사람들과의 부딪침은 마치 도미노처럼 아무 방향으로나 불쾌함으로 전달되기 쉽다. 반대로 소소한 감사도 도미노처럼 모든 만남에 전달되어 행복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돌이켜보면 낯선 이와는 인사를 교환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의 우리는 아는 사람끼리만 특별히 배려하는 경향이 강하다. 주인공에게 사뭇 쌀쌀하던 검사가 고등학교 후배라는 말에 금세 표정을 바꾸어 '우리' 집단의 곁을 주던 영화 <검사외전> 장면처럼.


하여 백화점이나 공공기관 등의 서비스직 직장인들은 편리하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고마움에 대해 오히려 무례한 불특정 고객들의 언행으로 인한 <감정 노동자의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견디다 못한 기관들은 상담전화를 받은 서비스 직원의 상처를 예방하기 위해


"여러분의 전화를 받는 저희 직원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와 같은 멘트를 고객과의 전화통화 연결에서 먼저 들려주고 있는 시대이다.


작은 딸 부부는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엄마를 반가워했다. 사위는 식욕을 잃은 아이를 위한 '맥모닝 세트'와 나의 '브런치 메뉴'를 이른 아침에 '예술의 전당' 부근에서 사 왔다며, 나의 아침식사를 권했다.


달콤한 시럽이 곁들여진 <핫케익> 덕분에 체중조절은 거꾸로 가지만, 보기만 해도 혀끝이 달달해지며 행복한 공기가 이어졌다. 다행이다.



<너무 행복해서 기절> 이모티콘으로


오전에 아이의 집 욕실에서 아이를 씻겨서 나오는데 여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우리 팀모임을 이끌고 있는 친구는 팀모임 관련 의견을 내며, 내 생각을 물었다. 덕분에 친구의 다정한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오후에 남편과 큰딸의 도움을 받아 아픈 손주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큰 딸이 아이 짐을 들고 동행해 준 덕분에 나는 어깨통증이 있는 왼팔보다는 오른쪽 어깨에 의지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안아'를 노래하는 14kg의 아이를 오른쪽으로는 안아 올릴 수 있다.


아이를 안은 채, 두 번째 방문에 아직 익숙지 않은 병원에서 해당수납창구를 물으니 제복차림으로 청소하시던 분은 감사하게도 일을 멈추고 밀걸레를 든 채 직접 안내해 주었다.


오늘도 역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 모두 아이를 편안하게 도와준 덕분에, 바짝 긴장해 있던 유아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진찰이 끝나고 나올 때, 아이는 나와 함께 친절한 의사 선생님께 허리 굽혀 인사했다.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주차장 입구에서 병원영수증 코드를 입력하여 무료주차도 했다.


순조로운 병원 내원과정으로 인해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의 차 속에서 내 핸드폰의 카톡창이 바쁘다. 병원진찰결과애 대해 궁금한 아이부모의 '부재중 전화''카톡 메시지'들을 확인하는데, 예쁜 그림과 함께 평소와 다른 스타일의 카톡 메시지가 추가로 떠있다.


"축하해요~"


별안간 뭘 축하한다는? 카톡 프로그램이 자주 업그레이드되면서 잘못 검색한 제품 판매처까지 쉴 새 없이 주소창을 만들어 자리하곤 해서 요즈음은 <나가기>를 눌러서 '잡동사니 카톡주소들을 없애기''짬짬이 작업'이 되고 있다.


낯선 카톡 내용을 조심해서 확인해 본 즉, 아침에 통화했던 친구가 스타벅스 상품권을 카톡으로 보낸 거였다. '커피 한 잔'도 아니고 옆지기와 큰딸까지 함께 <Tea time>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교직에서 퇴직한 친구가 뭔가 핸드폰 조작버튼을 실수로 누른 건가?


남편이 운전 중인 차 뒷 좌석에 장착된 유아용 좌석 벨트를 아이를 위해 고정해 주고, 한숨 돌려서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야, 무슨?"


곧 답장이 왔다.


"아, 모레가 네 생일이더라고. 미리 축하해~^^"


그리고 그녀는 다른 생일축하 이모티콘을 또 날렸다. 이번 이모티콘은 귀여운 도토리 모자의 아기가 웃는 얼굴로 축하 중인 도안이다.

"우와, 어디에 내 생일이 쓰여 있는 거지? 이렇게 행복한~ "


나는 이번달에 출입국이 잦은 작은 딸 내외 상황과 손주의 병치레를 고려해서 9월에 담긴 세 사람의 생일을 10월 즈음에 함께 축하하자고 미루었다. 물론 같은 주소지의 옆지기와 큰 딸 그리고 나와 반려견은 외부에서 식사시간을 함께 할 예정이지만.


결정적으로 아침에 통화했던 여고동창생의 <톡 상품권> 생일선물은 나의 오늘을 천정에 풍선이라도 띄운 날처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너무 행복해서 기절" 이모티콘을 답장으로 골랐다.


<축하해요> 메시지의 마법 덕분에 오늘 나는 아침 지선버스에서의 사소한 언짢음을 상쇄하고도 넘치는 행복을 선물 받아 자정을 지난 시간까지 여전히 <행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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