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질검사에서 칼슘수치는 8.6~10 정도로 유지가 정상이라는데 큰아이는 수술 전에는 9.5였던 칼슘수치가 갑상선 전절제 후 10년인데 칼슘정을 5~6정씩 복용해도 늘 7.0~7.5 정도로 유지할 수밖에 없다.
칼슘정 여러알에 보조제인 비타민 D 몇 정과 마그네슘을 추가해서 잘 흡수되도록 처방을 받는다. 전신에 칼슘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 4개나 되는 부갑상샘의 몽땅 부재로 흡수가 원활하지 않나 보다. 부갑상샘 4개를 덤으로 소실한 갑상샘 전절제 수술 후과이다.
외래방문 때마다 신장내과 교수님과 함께 고민 중이다. 예약날짜 전에 나쁜 신호가 오면 정해둔 동네 내과에서 한번 더 혈액검사를 한다. 칼슘수치가 너무 낮으면 이틀에 한 알 더, 그리고 칼슘 수치가 높을 땐 잠시 한 알 줄여 복용한다. 그리고 편안해지면 원상 복귀하고, 8주마다 하는 대학병원 정기검사를 받는다. 외래진찰일에동네 병원 혈액검사 결과지도 주치의선생님께 제출한다. 처방 내리기에 참고되도록.
칼슘 약을 더 추가하면 급성신부전이 또 얹어질까 겁나고, 낮은 상태로 가자니 여러 문제들이 수반 중이다. 신장내과 교수님은 한숨을 쉬신다.
"그래도 여러 번 급●만성신부전으로 문제가 있어놔서 칼슘정을 더 늘리기는 좀... 매스꺼움도 약 때문에 생기는 걸 거예요."
어제는 종이처럼 찢어져 나간 엄지와 약지 손톱 끝부분의 쓰라림에 1회용 반창고를 붙였다. 격일로 한 알 더 올린 칼슘이 걸린다, 복통이 심하다 하니. 매일 한알을 더 먹기는 신장에 부담이 되어 격일째 되는 날 칼슘을 한 알 추가해서 복용하기로 한건데...
순한 큰딸은 '불편하다'는 말 대신 '엄마는 괜찮은지'를 묻는 것으로 자신의 불편을 넌지시 전한다.큰딸에겐 매일 불편이 일상이다. 더 심해지면 구토가 이어지니 식사를 건너뛸 뿐 약을 안먹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답답하다.
갑상선 전절제수술 후 병원의 부갑상샘 상실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퇴원한직후부터 저칼슘혈증과 고칼슘혈증을 번갈아 앓으며 수반되던 경련과 의식 상실로 인한 혼란의 시기땐 암담했다. 그때보다는 아주 감사한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딸의 마음이 건강해졌다. 대학원 공부, 그리고 드라마 시청과 연구자료 만들기, 아빠와 함께 할머니식 만두 만들기와 매일 취향저격 메뉴 선정 그리고 반려견의 존재 덕분이다.
요즘은 병원에서 부정맥과 빈맥 그리고 기립성 빈혈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좋다는건지, 아님 여전하다는건지 알 수 없다. 칼슘정의 석회화 부작용은 이미 시작되었으나조절할 방법도 없다. 칼슘조절장애 진단으로 고칼슘혈증과 저칼슘혈증을 오가는 증세로 불편을 겪은 지 10년째이다. 며칠 전 X-Ray 검사에서는 의사 선생님이 염려하셨던 동맥혈관은 괜찮은데, 척추 주변의 뼈에 칼슘찌꺼기가 군데군데 허옇게 얼룩얼룩 쌓인 부분이 확인되었다.
서른 초반은 수술 직후 1일 4시간마다 4정씩 4회 총 16정으로 시작된 칼슘복합제로, 이젠 감소한 수준이 여전히 매일 여러 알씩 처방되고 있는 칼슘이다. 부갑상샘이 없으니 제대로 필요한 부분에 공급되는 대신 조금 쓰이고 남은 찌꺼기는 배설되고도 쌓이는 중이다.
30대 후반 큰딸이 매일 복용하는 15정쯤 되는 약들 속에는 신장내과 처방약은 주로 몸에 필요한 칼슘 6~8정과 칼슘분해와 전달에 필요한 비타민 D그리고 마그네슘이 들어있다. 겁이 나는데 뾰족 수가 없다.
단지 환자측은 이전 입원건들의 원인이 된 중복처방이 내리지 않게 다른과의 처방 변화를 한번 더 보고한다. 이미 병원 컴퓨터에 기록되지만 워낙 방대해진 기록이라 저혈압으로 인한 혈압약 추가나 감소 등을 보고하기도 한다.
다른 갑상선 전절제 환자들은 갑상선의 부재로 갑상선기능저하가 되었으니 호르몬제를 복용하고 칼슘은 불필요하거나 1정 정도 복용한다고 한다.
내 큰아이는 겨우 3mm 암 제거를 위한 전절제 후 덩달아 손상된 부갑상샘 4개의 기능 완전손실로 고생해 온 기간이 10년이 된 지금 '이게 뭔가?' 싶다.
'이럴 땐 큰딸에게 호전적인 기질의 부모라면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까지 만들어진다. "수술이 잘 되었다."라고 연출한 집도의 멱살을 쥐어흔들었어야 했을까? 지혈은 인턴이 했나?
거대한 대학병원 시스템에 일개 환자보호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참 없다. 대학서클 후배가 매일새벽 보내오는 꽃 사진 Band와 음악밴드는이런 갈등을 다스리기에 자주 도움이 되었다.
*백합(百합 흰 나리, 11월 18일 탄생화, 꽃말: 순수, 순결, 희생)
30대 초반이던 2015년에 큰딸은 아주 작은 암알갱이 제거 수술 후 예기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며 일상이 멎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병원 들락거림이 3년째 이어졌을 때, 큰딸도 보호자인 나도 막막한 내일에 희망을 접고 우울이 왔다. 피아노도, 하모니카도, 콧노래도, 노래 듣기도 '멈춤'이었다.
일상은 고사하고, 잦은 병원 일정에 더해 짬짬이 회복기의 암환자를 위해 여러 가지 심리치료 과정에 참여했다. 남편은 두 여자의 이동을 위한 운전기사가 되었다. 3개월마다 새로 시작되는 과정인 주 1회 웃음치료사, 미술심리치료사, 동화구연가 자격증 과정에 1+1(one plus one)으로 모녀가 함께.후속 프로그램까지 열심히 참여했지만 돌아오면 기진하여 이틀은 비실거렸다.
암 제거 수술 후 큰딸은 체온이 지나치게 낮아져 늘 온몸이 너무 차가워서 내 몸에 닿으면 선뜻했다. 여름에도 핫팩을 여기저기 놓아주고 발엔 수면양말을 신게 하고, 사이좋게 둘이 백설공주처럼 잠을 잔다. 그렇게 3년을 채웠다.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되니 심장 관련 질환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암 수술 후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수술 후 5년이면 의료보험 중증환자 혜택도 벗어난다. 큰 아이의 경우 반복되는 입원과 여러 검사, 약처방으로 인한 병원비가 적지 않다. 암수술 5년 이내로 중증환자 혜택을 받는 기간이라 할 지라도 분명한 수술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갑상선외과와 갑상선 내과 외에 늘어난 여러 관련과의 담당의사나 응급실 의사의 사인이 정상급여로 되면 암환자혜택이 없어서 그 과들은 일반진료가 된다.
더구나 자가면역질환으로 진단되어 받게 된 입원치료주사제는 단계별로 가격차이도 크고 최소 하루에 수십만원으로 의료보험혜택도 없다. 심지어 입원실 대기가 길어 그나마 가능한 1인실을 배정받았다. 설령 오진으로 인한 치료과정이었다 할지라도 치료비용은 모두 환자가 부담해야했다.
대학원의 고단한 첫 학기
큰딸과 나는 심리치료사의 권유로"동물응용과학" 대학원에 갓 입학하여 진퇴로 갈등 중인 첫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너무 고단한 상태의 체력으로 참여한 '인간과 반려동물의 교감'에 대한 공부는 무리가 되었다.
우리들이 학교를 계속 다닐 것인지 여부를 결정짓기 위해 화, 목 이틀은 교수님의 정부기관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특수학교 수업의 관찰자로 참여했다.
'환자와 환자 보호자가 매달 주 1회 KTX를 타고 고단한 일정의 대학원을 계속 다닐 수 있을까?'
'노후에 터무니없는 고비용과 시간투자의 가치는 있나?'
고민을 품은 채.
관찰자 역할은 장애아동특수학교에서 박사과정의 동물매개심리치료사가 치료도우미견과 아동들의 교감 교육을 진행하는 동안 프로그램 관련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하고, 참여아동과 치료도우미견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다.
미국 최대 동물매개심리치료프로그램 연구활동 기관인 Pet Partners와 국제기관 IAHAIO의 기준에서도 동물매개심리치료 프로그램은 프로그램 진행자 외에 참여동물의 안전을 위한 돌보미가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 아동들의 돌발적인 상황 발생 시 장애아동들에게 익숙한 보조교사가 참여한다. 그 외 사진이나 동영상촬영자도 참여하므로 일반 방과 후 프로그램과 달리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참여인수가 많다.
우리 모녀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씻고 머리를 말리고 아빠가 준비한 세끼 도시락을 들고 용산역이나 수서역으로 향했다.나중엔 요령이 생겨 전날 늦은 밤에 머리를 미리 감았다. 다음날 새벽 조금 더 잘 수 있게.
용산역에는 7시 20분쯤 출발하는 KTX 시간보다 3~40분 전에 도착했다. 적어도 기차를 놓쳐서 9시 수업에 지각하는 일은 없도록. KTX를 타고 급행으로 1시간 동안 달리는 들판을 구경할 엄두도 못 내고 졸면서 익산역까지.
잠깐 정차라 서둘다 노트북이나 도시락가방을 좌석아래 남긴 채 내리기 쉽다. 달리는 기차에서 노트북을 켜고 과제를 마무리하다 급하게 내리느라 아끼던 흰 필통과 만년필세트를 놓고 내렸다. 자잘한 소지품들도 함께 좌석이나 좌석 아래에 남겨져 분실되곤 했다.
또 졸다 역을 놓치지 않게 주의가 필요하다. 동기는 졸다가 익산의 잠깐 정차에 깨어나지 못하고 종점인 목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느라 수업 중간에 들어오기도 했다.
익산에는 국내 동물매개심리 치료의 동물응용과학 박사과정이 최초로 생긴 대학이 있다. 이 학문이 국내에 들어온 지 겨우 10여 년 되었으니 아직 국내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다.
귀경길은 용산역이 종점이니 안심하고 잘 수 있다. 여러 역에 정차하느라 1.30~ 2시간가량 걸리는, 가격이 조금 할인된 기차표를 끊었다. 2인이니 4주 전 예약하면 편도 만원쯤 저렴하다. 밤늦은 용산역 제일 제면소의 따뜻한 국물이 있는 국수값은 된다.
3~40대 동기들은 집에서 기다리는 어린 자녀들을 위해 수업을 최대로 빠르게 끝내고 급행열차로 귀경한다. 우리는 남편이 우릴 위해 따뜻한 누룽지 숭늉을 준비해 두고 기다린다.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이동후 마을버스로 집에 도착하는 고된 일정의 학교를 다녀오면 문자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게 지쳐있다. 그래도 큰딸의 체온 유지를 위해 귀가직후 따뜻한 물샤워는 필수다.
병원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 환자의 체력이나 60이 넘은 보호자에게는 꽤 버거운 일이어서 공부는 고사하고 이틀은 침대에서 비실거렸다.
그리고 남은 요일에 대학 병원을 가고 복용약과 진료내역을 A4 용지에 요약해서 원본과 함께 변호사에게 보내고, 세 과목의 과제를 하고, 낯선 학문의 복습이 가능했다. 심지어 과제는 학교로 가는 KTX에서 노트북을 펴고 마무리가 필요하기도 할 만큼 많았다.
그러나 결석은 곧 자퇴를 결정하는 신호임을 잘 알고 있어서 고집스레 열심히 출석했다. 그 와중에 대학병원 검사일정과 외래진료일정은 미리미리 확인해서 잘 피했다.
딱 한번 2개월을 기다려 빈자리에 검사일정을 넣어준 날 하루는 결석했다. 그렇게 KTX로 이동을 해야 하는 먼 거리에 위치한 대학원의 2년 출석 일정 중 결석은 단 하루로 막아졌다.
첫 만남
*외출한 큰누나를 기다리는 중인 수리
작은 딸은 결혼 이후 초6부터 키운 친정의 반려견이 하늘로 간 뒤부터 쉬는 주말이면 가끔 "유기견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은 딸이 내게 '큰딸을 위한 유기견 입양'을 권했다.
유기견에 대한 아이디어가 별로 없던 우리는 제대로 된 혈통 확인도 없는, 새끼가 아닌 성견입양에 대해 호감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작은 딸과 함께 온 가족이 2018년 6월 6일 현충일에 <경기도우미견센터>를 방문했다.
말티스 수컷인 3세 '수리'는 유기견센터에서 만났다. 복종훈련을 받은 후에도 분리불안과 식탐조절이 안되어가장 오래 입양이 안되고 있다는 녀석이었다.
갇혀있던 우리에서 우리 가족과의 만남을 위해 미팅홀로 나오게 되었다. 다른 개들과의 어울림도 무난해 보였다. 리드줄을 놓아주니 이미 나와서 달려 다니는 개들과 어울려 뒤뜰 놀이터를 잠시 다녀온 후 미팅홀의 소파 위로 올라가 앉았다.
수리의 복종 훈련을 담당했던 훈련사는 영특한 편이나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았고, 분리불안이 심하니 다른 개를 입양하기를 권했다.
Shetland Sheep Dog, Welsh Corgi와 함께 한 경험을 돌아보면, 해외의 단독주택살이와 달리 국내에선 아파트에 거주하는 반려인에게는 소형견과 함께 지내기가 수월하다. Pet Loss 증후군을 겪어 힘들었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입양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이번엔 관리하기 수월하게 처음부터 소형견 입양으로.
*조현병 환자들을 위한 AAT(동물매개심리치료)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수리
적어도 그날 살펴보는 우리 앞에서 수리는 단 한 번도 짖지 않았다. 여기저기 오줌을 지리며 컹컹대고 무리 지어 달려 다니는 센터의 개들과 달랐다. 기다림이 지루했던지 수리는 소파 위에 엎드린 채 가만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훈련사의 권유로 푸들 '까망이' 입양에 사인을 할 때에도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훈련사의 만류로 가족들은 의논에 의논을 거듭했다. 그리고 엄마의 수고가 더 늘어날까 봐 염려한 작은 딸의 염려도 있어서 원래 예정했던 '수리'를 포기하고 푸들 '가망이'를 입양하기로 했다.
큰딸은 수리의 간절한 눈빛을 떨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큰딸의 슬픈 눈빛을 본 작은 딸이 언니생각대로 하자고 했다. 그렇게 토요일의 오전 시간을 모두 보내고 '수리-까망이- 수리'로 세 번이나 입양서류를 고쳐 쓴 끝에 하얀 털의 말티스 '수리'를 입양했다. 토요일에 근무하신 담당자분은 감사하게도 정성껏 도움을 주며 수리의 하울링을 염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