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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방향의 잡는데, 감정을 이용하는 방법

by 이완

"Take her to the moon fo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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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빙봉은 기쁨을 라일리에게 보내기 위해 자신이 소멸되는 결정을 한다. 성공적으로 기쁨을 떠나보낸 뒤 소멸되는 빙봉은 라일리의 행복을 빈다. 빙봉의 희생에 기쁨이는 처음으로 슬픔을 느낀다. 슬픔을 느낀 기쁨이는 라일리 감정 조정대를 슬픔이가 잡을 수 있도록 한다. 라일리는 가출 후 집에 돌아와 울면서 웃는다. 이제 단편적인 감정이 아닌 슬픔과 기쁨 등 다양한 경험이 혼합된 기억을 갖게 된 라일리는 한 층 더 성장했다. 감정에 대한 이해는 삶을 성장시킨다.


인생의 방향에 확신이 없다면, 감정에 이름 붙이기를 멈춰라.

확신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위험하다. 내가 확신하고 결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도 나의 결정에 책임져줄 수 없다. 여기서 문제는 내가 어떻게 확신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에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온전한 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보고 들은 많은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어디까지가 우리의 온전한 생각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나의 온전한 판단은 '감정'에 있다. 정혜신 전문의는 '내 감정과 느낌만 온전한 나' 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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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우리 삶의 지표다. 감정을 잘 파악하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이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맞는지 파악할 수 있다. 감정은 행복, 슬픔과 같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감정을 매우 제한적 시각으로 보는 행동이다. 인사이드아웃에서 기억이 여러 가지 감정의 색을 내듯, 감정은 복합적이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복합적인 감정을 단순화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확신을 갖기 위해선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은 단순한 정신적 경험이 아니다. 신체적 반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단순한 '무서운 느낌'이 아니라, 심장 박동 증가, 근육 긴장, 호흡 가속과 같은 신체적 요소를 포함한다. 감정을 이해할 때, 우린 단어가 아닌 이 신체적 반응과 느낌에 주목해야 한다.


감정은 단어로 표현하기에 제한이 많다.

전통적인 감정 이론은 "기본 감정(basic emotions)" 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혐오, 놀람 같은 감정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느끼며, 특정한 얼굴 표정이나 생리 반응과 연결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리사 펠드먼 배럿은 이러한 전통적인 감정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구상적 감정 이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으로, 감정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감정은 제조된 제품처럼 미리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뇌가 다양한 요소(신체 감각, 기억, 환경 등)를 종합해서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상적 감정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감정을 특정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단순화'하는 것이다. 행복이라고 부르는 감정에 엄청나게 많은 변주가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감정을 단순화하는 것이 삶에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지만, 감정은 온전한 나다. 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을 때, 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고 삶에 대한 결정도 내릴 수 있다. 감정은 우리의 존재처럼 단순하지 않다.


언어로 표현된 색깔은 내가 보는 색깔을 규명한다.

히미바 부족의 특별한 색채 분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언어에서는 'buru'라는 단어로 파란색, 녹색, 일부 보라색을 통합적으로 표현한다. 하미바 족은 파란색과 녹색의 차이를 인식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파란색과 녹색이란 단어를 쓰는 우리들은 쉽게 구분할 수 있는 색인 경우에도 하미바 족에게는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어는 반대로 언어의 영향으로 색을 더 자세 본다. 러시아어는 파란색을 'синий'(진한 파랑)와 'голубой'(밝은 파랑)로 구분한다. 러시아안운 파란색의 미세한 차이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 비해 영어 사용자들은 동일한 색상 차이를 구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감정 역시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할수록, 감정의 차이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감정은 복합적이다. 감정을 분류 짓는 것은 감정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방해가 된다.


감정을 부르지 말고, 느껴야 한다.

감정은 우리의 온전한 반응으로, 삶에 지표가 된다. 감정을 단어로 표현하고 머리로 해석하는 일은, 담을 수 없는 그릇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마치 3차원의 구를 2차원의 원으로 담으려는 것과 같다. 2차원의 원 위에 구를 올릴 수 있지만, 구를 온전히 담았다고 할 수 없다. 삶의 방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자. 지금 이 방향이 맞는지, 내가 잘 가고 있는지. 그리고 눈을 감고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지 집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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