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레도 대학에서 인지신경심리학으로 박사학위, 좌우뇌 비교연구를 전공
펜실베니아 주 슬리퍼리 락 대학에서 인지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
정신세계사에 편집자로 면접을 본 적이 있다. 편안한 분위기의 미팅이었고, 담당자분에게 책 추천을 부탁드렸다. 그때 추천과 함께 선물 받았던 책이다. 그 당시에는 끝까지 읽지 못했는데, 늘 제대로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우리는 우리 주의에 무한히 펼쳐진 의식이라는 바닷가에서 겨우 한 움큼의 모래를 집어 들고서는 그것을 ‘세계’라 부른다”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세상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에고가 창조한 ‘패턴 인식 메커니즘'으로 본다. 우리가 가치를 두고 있는 많은 부분이 깊이 들여다보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좋고 나쁨.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뉜다. 그런데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다면, 누군가는 나쁜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하나의 선택은 나머지 극단의 사람을 만들어 낸다. 누군가가 좋은 사람이 된다면 내가 나쁜 역할을 맡게 될 수 도 있다.
부자가 되거나 원하던 물건을 얻으면 행복도 얻어질까? 물질이 아니라 인간관계나 경험처럼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가치판단에 달려 있다. 즉 ‘대상’이 아니라 ‘과정’이 관건이다.
기억도 같다. 기억은 비디오가 아니다. 우리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고도로 왜곡되고 편향된 이미지일 뿐이다. 기억은 더 많은 생각들의 집합일 뿐이다.
백일몽은 그 쇼의 관람료를 꼭 받아내고야 만다.
어디까지 해석일까? 세상에서 해석은 공기처럼 존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다.
좌뇌의 임무는 해석이다. 자신의 필터로 해석하기 때문에 현실과 다를 수 있다. 좌뇌의 임무는 해석이기에, 오류의 가능성에도 늘 당당하고, 늘 최선을 다한다. 해석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지도는 실제 지역이 된다.
해석하는 마음은 늘 진심이고, 성실하다. 삼각형, 작은 삼각형, 동그라미의 의미 없는 움직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좌뇌는 마치 껌 한 개를 극단적으로 길게 늘여서는 양 끝을 가리키며 서로 반대 성질이라고 믿는 것 같다. 어찌해야 양 끝이 도로 합쳐지는지 몰라서 혼란스럽게 행동한다. 좌뇌는 대립성을 기반하여 작동하기에 에고적 마음은 모든 것을 다른 무엇, 즉 상징으로 만들어 버린다.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 당신은 ‘강아지’란 단어와 같이 놀 수 없고, ‘물’이라는 단어를 마실 수 없으며, ‘전화기’라는 단어로 통화할 수 없다.
해석하는 마음은 동사를 명사로 만든다. 과정을 사물로 만든다. 소중한 순간 사진을 찍는 것은 움직이는 과정을 사진이라는 물질로 만든다. 살아 있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형태로 변환한다. 하지만 그건 과정이 아니다.
가벼운 성적 자극으로 인한 흥분은 순식간에 불의나 불공정 무능에 대한 분노로 탈바꿈될 수 있다. 반응이 격렬할수록 그 반작용도 강해진다. 강한 긍정적인 느낌은 또 쉽게 같은 강도의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장 자신감 있어 보이는 사람은 자신 있어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하기를 원하지 않을 때 그것을 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물론 아닌척하는 것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해석과 감정의 반응에 절대적인 공식은 없다.
부정어인 ‘하지 마, 굴지 마”는 개념이나 생각이 아니라서 아무것도 활성화시키지 않는다. “뛰지 마”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뛰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걷기, 서 있기, 그림 그리기 말하기 등) 손에 잡히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게임에 지나치게 빠지면, 게임 중독이 되고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해석(무엇 시스템, 에고의 이야기)에 빠져들면 당신은 옳고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확신하게 된다. ‘무엇' 시스템은 심각하고 진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해석을 실제로 믿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은 우리가 이 게임을 진행할 수 있는 핵심이다.
대부분 TV 프로그램은 의식에서 패턴 또는 틀을 강요한다.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의지한다. 쇼나 영화는 비교적 평화로운 느낌으로 시작되지만 이내 갈등을 만들어 절정에 치닫게 한 후에야 막판에 그것을 해소시킨다. 그러면 우리는 영웅이 승리하고 악당이 정의 심판을 받은 것을 보며 잠시 기뻐하고 안도한다. 쇼가 끝나면 다른 쇼로 눈을 돌리고 거기서 똑같은 경험을 반복한다.
다스 베이스가 없는 스타워즈, 스미스 요원이 없는 매트릭스. 악당들이 빠졌을 때, 관객들이 영화관을 박차고 나와 환불해달라고 아우성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우리가 얼마 큼의 평화를 원하고 있는지 이런 사실들이 말해주고 있다. 영화 속 평화도 제대로 못 견디는데 실제 현실에서 평화를 원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부정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좋은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에고적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에고가 환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전혀 재지 않고 행동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확신을 갖고 행동한다. 춤꾼은 춤을 소유하지 않는다. 춤은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치 달리기를 할 때 운동화를 한 켤레 더 뜰고 뛰면서 그러게 하면 더 빨리 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애씀과 노력. 그것은 불가하다. 에너지를 더 쓸수록 더 깊이 끌려 들어간다. 빠져나갈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그 함정 안으로 들어가 함께 하라. 놀려고 애쓰는 사람보다 최악이다 심각한 것은 없다. 아이들처럼 놀이를 즐겨라
스스로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덜 영적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허깨비를 쫓는 것처럼 부질없다. 모든 규범은 해석하는 마음에서 나옴. 깨달음 성취 여부를 알아보는 점검표 따위는 없다. 오직 좌뇌만이 규칙을 필요로 한다.
아이들은 잘 논다.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으악, 괴물이 날 잡으러 온다!”라고 하며 도망친다. 하지만 절대로 못 잡을 정도로 빨리 가지는 않는다. 뒤에서 와락 붙잡으면 이번에는 쉼 없이 깔깔대며 ‘제발 나를 놔주세요(그렇지만 진짜 놔주지는 마세요)’게임을 시작한다. 조금씩 강도가 세질 때마다 게임은 더욱 재밌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른이 되면 한껏 집어넣을 심각함이 쏙 빠진 ‘드라마’의 초기 형태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드라마가 근본적으로 ‘놀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물론 어른이 되면 괴물은 더 현실적인 생생한 모습을 띤다. 스포츠 종목 역시 과일주스에 보트카를 섞은 셈이다. 우주는 하나의 놀이이다. 그 게임은 본래 자기가 아닌 어떤 것이 되어보는 것이다. 우주는 정말 잘 ‘놀기’ 위해 만물에 특히 마음에 대립성을 불어넣어야 했다.
벨라지오 분수. 단일한 원천으로 시작된 물이 수백 개의 개별적인 것들이 된다. 잠깐 분리되어 움직이고 춤추다 어느새 근원으로 합쳐지고 다음 순간 또 다른 형태로 분리된다. 분리와 합일을 반복하다 보면 문득 하나의 물이 있음 뿐임을 볼 수 있다.
책장을 넘길수록, 겸손해졌다. 꾸준히 관심을 갖고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도 꾸준히 갖고 있다고 자부심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책을 보며 내가 얼마나 현존하지 못하고, 많은 해석 속에 빠져 있는지 느꼈다.
진지해지거나 심각해질 때, 또? 해석에 걸려들었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또 뭔가 깨달음에 대한 부담을 확 내려놓게 하는 책이어서 좋았다. 역시 지금 여기 이 안에 모든 답이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