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스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그책
내 적은 기업가들이다. 내 적은 주주들이다. 요즘에는 전부 공기업이다. 그리고 주주들은 투자 수익에만 관심이 있다. 제품이나 전문 기술이나 회사의 명성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주주들의 관심이 오로지 투자 수익에만 묶여 있으니 회사에 별 애착이 없는 임원들만 신이 날 수밖에. 그런 이유로 작업 현장은 점점 더 척박해져 가는 것이고, 그들은 회사나 스태프나 제품이나 고객에 대해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다.
사회의 선을 추구하는 것 역시 애초부터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주주들의 투자 수익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이다. 민주주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목적으로만 리더들을 지지하는 것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항상 흑자를 내고, 주주들에게 두둑한 배당액을 보장하는 유량기업들이 한 푼의 이윤이라도 더 뽑아내기 위해, 그래서 임원들의 백만 달러, 천만 달러, 이천만 달러짜리 보상 패키지를 보장하기 위해 수천 명의 직원을 해고한다.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적이 누구인지, 하지만 적을 안다고 해결된 건 없다. 당장 주주 천 명을 죽인다고 내가 뭘 얻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이천 명의 쓸 만한 직원을 해고한 임원 일곱 명을 죽인다 한들 내가 뭘 얻어낼 수 있겠나? 내게 득 될 건 아무것도 없다. CEO와 그들을 그 자리에 앉힌 주주들이야말로 내 진정한 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이 사회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문제일 뿐 내가 개인적으로 챙겨야 할 일이 아니다.
이 서늘할 정도의 날카로움, 이것이 버크 데보레다. 그는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나보다 한 단계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괴로웠던 것도 이런 문제였다. 돈이 없는 것은 내 현실이었는데 난 내 적을 알고 싶었다.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세운 그 존재들 말이다.
코카콜라 하나를 먹고 싶어도 사지 못하고, 담배를 피고 싶으면 어머니 심부름을 하고 받은 잔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서 담배를 사는 이런 현실을 뒤로 한 채, 난 내 적이나 찾고 있었던 것이다. 득 될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난 버크 데보레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무직의 생활을 연속해서 이어 갔던 나에게는 사람들이 있었다. 폐인처럼 있던 나에게 슬며시 방문을 열고 아무 말 없이 2만원이든 만원이든 두고 갔던 아버지, 욕을 하시면서도 밥 챙겨 주시던 어머니.
어느 날은 아버지가 불러 나갔는데 별 말 없이 삼겹살 집에서 나를 앉혀 놓고 고기를 구우셨다. 그리고 나에게도 소주를 따라주고 자신도 드시고 그렇게 둘이 아무 말 없이 고기를 먹었다. 아버지는 다 먹고, ‘배 부르냐’ 한 마디만 하셨고, 난 아버지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버크 데보레의 아버지는 그에게 권총을 남겨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게 빼앗은 총을 말이다. 그 총으로 버크 데보레는 자신에게 필요한 일자리를 찾기 위한 작업을 착수한다. 그 작업이란 자신이 들어갈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과 그리고 자신보다 조금 뛰어난 이력을 지닌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다른 지원자가 몰리기 전에 착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여기서부터 나와 데보레는 길이 갈렸다. 물론 데보레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상황을 난 잘 알기 때문이다.
데보레는 자신의 아버지는 죽여 할 적이 명확한 시대에 살았다고 자신처럼 누굴 죽여 할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 지 않았다고 한탄했다. 난 내 아버지에게 평생 페인트 미장이 일만 하는 것에 대해 한탄했었다. 다른 일을 좀 해보지 왜 그런 일만 하는 것일까? 도전 의식이 없다고 말이다.
근데 30살이 돼서 무직이 된 처지에 나를 곰곰이 들여다 보니 남자가 나이를 먹고 직업을 바꾼 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다 할 지라도 평생을 해 온 직업이면 그 속에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고, 삶이 묻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냉정한 공식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바꾸고 살아 가기란 어렵구나란 것을 난 그 때 알았다. 아버지도 고생하는구나. 힘들겠구나 하는 마음도 같이 알고 말이다.
냉소주의적이고 자신만의 삶을 위해 살인도 주저하지 않는 버크 데보레와 난 여러 가지로 다르다. 집에만 쳐 박혀 있는 나를 위해 1톤 차에 태워 물건 나르는 일도 시켜 준 선배도 있고, 일부러 만나자고 해서 밥도 사 주던 친구도 있었다. 그들은 살고 있었다. 적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1년을 버텼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버크 데보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은 시간이었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게 살지를 못한다. 나를 살리고 싶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경비 반장님의 기억하라는 말이 소용돌이쳐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갑작스런 한마디로 날 감동시킨 경비반장님은 나를 찾아온 석가나 예수의 재림 같다고 느껴지며 그 전보다 더 공손하게 대했다.
근데 그저께 화단에 오줌을 싸는 건장한 어른에게 육두문자를 쓰시며 욕하는 모습을 보며 석가나 예수의 재림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결론적으로 버크 데보레의 사상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거부할 수도 없음을 말이다. 하지만 모두들 버크 데보레처럼 생각한다면 살기 무서울 것이다. 이 사람의 삶 속에는 무직자의 삶이 아주 처절하게 그려져 있다. 나 역시 그런 부분에서는 공감하고 말이다. 하지만 삶은 다채롭고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지니고 있다.
괴로워도 즐거워도 살아가야 한다. 만족스럽지 못 해도 말이다. 아이들이 나를 무시해도 말이다.
그저께는 새벽 2시에 눈이 빨간 술에 취한 광인 주민께서 관리사무소를 두들기며 나를 깨웠다. 일어난 나에게 ‘너 잤지, 잠 잤지’라며 (원래 관리사무소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1시간을 같은 소리를 반복했는데 버크 데보레의 권총을 좀 빌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막상 버크 데보레와 나의 간격은 좁은 듯하다. 그러나 난 그 길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좁다고 한 들 그 틈은 있을 테니 말이다. 인간의 길로 가는 틈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