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태백산맥

by 노석

P시의 가구단지에서 일할 때, 회사에서 8백만원 수금을 위해서 인천까지 심부름을 시켰다. 화창한 금요일 오후 버스, 지하철, 택시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무려 3시간의 여정, 오후 12시에 출발해 저녁 9시에 회사로 복귀했다. 회사에서 받은 경비 3만원 중 택시비라고 거짓말을 하고 읽고 조정래 작가의 ‘허수아비 춤’을 인천 영풍문고에서 구입했다. 대신 택시를 타지 않고 역까지 1시간은 걷고 말이다.

'조정래'라는 작가의 이름을 들으면 마음이 설렌다. 작가님과는 남다른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26살이란 늦은 나이로 군대에 입대했다. 상병이 되었을 무렵 맨날 여가 시간에 책을 읽고 있어 독서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져 군에서 문화복지 사업의 일환인 '독서병'이란 말도 안 되는 직책을 맡게 됐다.


군에서는 군인의 지식 향상을 위해 1년에 한 번 30만원의 도서 구입비를 지원했다. 나는 군 동지들에게 무슨 책을 읽고 싶은지 철저한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여론 조사 결과 그 누구도 읽고 싶은 책이 없다는 답변만 들어왔다. 아직도 기억나는 명대사는 '책이라고 한다면 맥심을 구입하라'는 피 맺힌 절규였다. 결국 아무런 책도 선택하지 않은 군인들을 대신해 나는 그동안 못 샀던 책을 마음껏 구입했다.


그 중에는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도 들어 있었다


'태백산맥' 전 권 세트를 구입해 열심히 읽던 중, 대대장은 새롭게 구입된 책을 시찰하겠다며 독서실을 방문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잘 정리된 책들을 흐뭇한 미소를 띄며 보던 대대장은 갑자기 표정이 일그러졌다. 검은 표지에 빨간색 글자로 멋지게 쓰여 있는 '태백산맥'이란 책을 보자 대대장은 그 책이 부모를 죽인 원수가 쓴 책을 보는 듯 분노했다.


보안담당관인 상사를 불러 '어떤 개념 없는 새끼가 이런 빨갱이 서적을 신청했어!'라고 1차 빨갱이 선언을 하셨으며, '다 가져다 불 태워!'라는 진시황도 어이없어 할 분서갱유의 2차 선언을 해 주셨다.


마지막 화룡정점은 '이 책 신청한 새끼 사상 조사하고 영창 보내 버려!'란 발언이었다. 나는 '태백산맥'이 국가보안법상 이적 표현물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 상사도 구입 책 목록을 보여주니 핸드폰으로 게임하느라 리스트는 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맘대로 사라'고 말한 책임이 있음에도 자신에게 질책이 올까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대대장의 지시로 행보관에게 끌려가 사상 조사를 받았다.


행보관은 책상 위에 A4용지를 놓고 볼펜 한 자루를 주고 군 내부망 해킹을 시도했는지, 반국가단체와 접촉 했는지 여부를 상세하게 쓰라고 하였다. 내가 너무 겁을 먹어 손을 벌벌 떤 모습을 보자, 상사는 딱해 보였는지 나와 관련된 과거 일화를 언급하며 변명해 주었다.


내가 이등병으로 부대 온지 얼마 안된 어느 일요일, 내무반에 각 잡고 앉아 있던 나에게 상병이 2층 보급실에 가서 맥심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였다. 관등성명을 댄 후 힘차게 2층으로 올라갔다. 보급실은 부대원들이 먹을 수 있는 간식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관리하는 이병도 있었다. 그 이병은 나랑 동기생으로 나이차는 많이 났지만 동기여서 서로를 애뜻하게 챙겨주던 사이였다.


보급실에 가서 동기에게 맥심을 가지러 왔으니, 프림과 설탕을 넉넉히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쟁반에 맥심 커피와 프림, 설탕 그리고 정수기에서 컵에 뜨거운 물을 받아, 스푼과 함께 어디 귀족이 드시는 커피 세트처럼 차렸다. 동기에게 이 정도로 셋팅하면 내 정성이 보일까 문의하니, 이 정도면 넌 내무반의 귀염둥이가 될거라며 칭찬해 주었다.


커피 세트를 왕에게 바치는 궁녀처럼 조심, 조심 소중히 들고 내무반 문을 열고 상병에게 맥심을 가져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맥심 커피 세트를 보자마자 상병은 내무반을 굴러 다니며 크게 웃었고, 병장과 다른 병사들도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다들 왜 이리 웃나 당황스러웠다. 일요일인데 내무반이 너무 시끄러워 들어온 당직사관인 보안담당관 상사도 병사들의 얘기를 듣고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뭔가 집단 정신병에 걸린 줄 알았다.

사실은 많이 헐벗은 여성들이 나오는 맥심(MAXIM) 잡지를 가져오라 시켰는데, 맥심 커피를 가지고 온 것이다. 보급실 동기 말대로 그날부터 이름 대신 ‘맥심 커피’라고 불리며 진짜 내무반의 귀염둥이(?)가 됐다.


이런 일화를 언급하며 상사는 말했다.


“얘는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행보관님 인적사항 보셨겠지만, 대학도 자퇴해서 사실 고졸이에요. 고졸.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 고졸이 어딨어요. 요즘엔 대학생도 공산주의를 몰라요. 그런데 고졸이 어떻게 압니까? 또 생활하는 거 유심히 보니 약간 덜 떨어져 보이더라구요. 아니? 이게 제 개인 의견입니까. 저번에 부사관 회의 때 얘 관련해서 ‘관심병사는 아닌데 관심병사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우리가 얘를 관심병사로 포함시킬지 아닐지 치열하게 얘기했잖아요. 행보관님 다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날 위해 열변을 토하며 말하는 상사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듣다 보니 기분은 점점 나빠지더라. 일단 행보

관님은 상사의 말에 납득하며(?) 조사 시간을 길게 끌어 대대장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내가 있던 군부대는 서울에 있어, 평상시에 군무원들과도 같이 업무하는 곳이었다. 불침번 근무를 서면 담 밖으로 지하철 역도 보였다.


사상 조사를 받은 후 군무원들에게까지 소문이 퍼졌다. 소문은 소문을 낳아 26살까지 군대를 들어 오지 않은 것은 '지하 학생 운동권 조직의 핵심 멤버' 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에 정통한 공산주의 이론가' 였다는 얘기가 부대 내 떠돌았고, 마무리는 부모님이 모두 중국분이며 중국 공산당 출신의 조선족이라는 출신설까지 나오게 됐다.

암튼 많은 사람들에게 난 지하 학생운동은커녕 대학도 안 나왔다고 해도 다들 믿지도 않았고, 평소 말투가 어눌한 게 원인이 되어 하얼빈 출신 조선족이냐고 질문까지 받을 정도로 피곤한 군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가장 큰 고민은 언제 영창을 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숨 막히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토요일 불침번을 서던 한 보초병이 담배꽁초를 실수로 파지를 보관한 곳에 던져 불이 났다. 내 보직은 소방대 소속으로 소방 상황병이었다. 불이 나면 당직사관은 대대장에게 보고해야 하고, 상황을 판단하여 주변 소방서에 지원 요청 해야 한다. 근데 당직사관은 주말이니 대대장에게 연락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불나면 다 죽는다는 생각에 일단 당직사관한테 전화를 빼앗아 대대장한테 전화했다. 대대장이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충성, 상병 누구입니다. 불 났습니다. 불 났어요!”


그러곤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대대장 답변도 듣지 않고 끊어 버린 채, 부대에 연결된 핫라인 전화기로 소방서로 연락하여 지원 요청했다. 웃긴 건 소방서에서 부대 입구가 어딘지 모른다고 하여, 당직사관 휴대폰을 빼앗아 입구까지 달려가며 통화하여 소방서에 길 안내하며 입구로 달려갔다.

한산한 토요일 오후, 부대 입구를 막고 있는 헌병대에 사정을 말하고 문을 활짝 연채로 소방차들을 기다렸다. 여태 살면서 그리 많은 소방차는 처음 봤다. 소방 상황본부 차, 고가 사다리차 등 7개 대의 차량들이 빠르게 부대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소방차들을 부대로 안내하고 헉헉 대며 부대로 오니, 이미 10평의 파지 창고 불길은 너무나도 조그만 불 이었기에 출동한 후임들의 양동이 물로 꺼져 있었고, 소방서에서 온 멋들어진 고가 사다리차는 고층이 없어 어디로 사다리를 대야할 지 몰라 파지 창고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근처 부대 식장에서 결혼식에 참석했던 대대장은 정장 차림에 넥타이는 풀어진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부랴부랴 부대로 돌아왔고, 멋진 소방차들의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저렇게 조그만데 불났는데 소방차 부른 새끼 누구야! 영창 보내버려!"


모두의 시선은 나에게 쏠렸고, 난 정말 영창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마지막으로 화려한 퍼포먼스를 한 것처럼 보여졌다. 졸지에 남들은 한번 가기 힘든 영창을 두 번 가게 될 상황이었다.


나라가 공산당 만들고 지주가 빨갱이 만든다.

-『태백산맥』

참으로 나라가 공산당 만들고, 군대가 빨갱이를 만드는구나.


하늘을 바라보며 처분만 기다리고 있던 그 때, 소방 상황본부차가 눈 앞에 서더니 근엄하게 생긴 소방서장께서 내리시며 말하셨다.


"우리에게 연락한 병사는 누구죠? 아주 훌륭한 소방병입니다. 저 파지 창고 옆으로는 부대 전체에 석유를 공급하는 기름 창고가 있는데 만약 빠르게 조치를 안 했다면 저 기름창고까지 불이 번져 엄청난 난리가 났을 겁니다."


대대장은 그 한 마디 말을 듣자마자, 나를 데려오더니 소방서장님께 인사시키며, 자신이 평소 훈련을 매일 시킨다며 친일파 싸다귀 날려버리는 태세 전환을 보여 주었다. 결국 나는 영웅이 되어 4박 5일 휴가를 받았고, 대대장 역시 상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찰리 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태백산맥은 그 자체로 역사의 흐름을 담고 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대의 거대한 흐름 속에 휘말리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태백산맥』



참고 문헌

1. 조정래, 『태백산맥 전10권』, 해냄,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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