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그가 아주 우연하게 행한 일을 통해서 자신에게 잠재해 있는 더욱 높은 것을 배우게 되는 법이라고.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보잘것없는 일이었지만 나의 인생 전체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고, 잊을 수 없는 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 『괴테와의 대화 1』 p16
20대 초반 나의 길을 찾기 위한 몇 년의 여정을 보냈다. 그런 속에 마음에 계속 각인된 루쉰의 글이 있었다.
어리석고 겁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건장하고 우람한들 조리돌림의 재료나 구경꾼이 될 뿐이었다. 병으로 죽어 가는 인간이 많다 해도 그런 것쯤은 불행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저들의 정신을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제대로 뜯어고치는 데는, 당시 생각으로,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문예운동을 제창할 염(念)이 생겨났다.
- 『루쉰 전집 2 외침 서문』 p20
이 문장은 나의 길을 찾는 20대 청춘의 마음을 계속 뒤흔들었고, 결국 문학을 통해 사람들의 정신을 개조하자란 막연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란 말처럼 소설은 전혀 구상도 하지 않으면서, 문학가의 삶을 꿈꿨다. 그 삶은 익히 알다시피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다. 일단 문학가의 첫 발음은 생계 해결을 위한 직업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런 직업 중 최고의 직업은 글로 돈을 벌 수 있는 ‘기자’가 최고라 정하고 그 길을 걷자고 마음먹었다. 마음먹은 대로 행동의 길은 하이패스로 달려갔다. 우연찮게 보인 신문사 알바 공고를 보고 무슨 일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해서 합격해 버렸다.
알바에 합격한 H신문사는 서울에 위치한 7층 건물이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1층에 안내 데스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사원증을 보이면 정문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난 6층 편집국이 알바 장소 였다.
6층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한, 두 걸음 앞에 불투명한 양개형 가네모 도어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람의 가슴팍 높이의 파티션들이 왼쪽, 가운데, 오른쪽으로 큰 세 그룹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세 그룹 속에 또 세부적으로 몇 개로 구분되어 파티션 있었고 해당 부서의 이름이 각각 붙어 있었다.
일단 사전에 통화한 대로 오른쪽에 있는 총무과로 가서 40살쯤 되어 보이시는 단발머리의 검은색 안경을 쓴 뚱뚱한 총무과장님께 인사드렸다. 총무과장님의 안내를 받으며 알바자리로 이동했다. 알바 자리는 가운데 파티션 그룹 쪽에 있었는데 큰 책상에, 의자가 3개 정도 있었다. 이미 의자 2개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기존의 알바생들이었다.
여자 2명인데 모두 20대인 내 또래처럼 보였다. 두 명의 여학생은 각각 개성이 확실한 스타일이었다. 한 명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화장을 안 한 수수한 스타일이었다. 사슴처럼 긴목과 조그만 얼굴. 거기에 대조되는 큰 눈은 조화를 이루어 굉장히 이뻤다. 또한 조그맣게 다문 얇은 입술이 침착한 인상을 주었다.
다른 학생은 핑크색 후드티를 입고 파마끼 있는 머리를 똥머리로 올리고 있었다. 눈두덩이를 비롯한 눈 근처는 약간 핑크색이 돈 화장을 했다. 긴 속눈썹이 이쁘게 자리 잡았는데, 내가 인사하자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미소를 띄었다. 볼에 약간의 보조개가 생기니 발랄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 할까? 굉장히 명랑해 보이는 어여쁜 인상이었다.
학생들의 미모를 보자마자, 이들과 함께할 나날이 너무 기대되어,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문학가의 앞날을 축복한다는 계시란 생각이 들어 교회도 안 다니는데 무릎 꿇고 기도할 뻔했다.
우린 서로 통성명을 했다. 차분한 인상은 혜원, 핑크의 어여쁜 학생은 수민이였다. 모두 동갑이어서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혜원이는 아직은 반말은 어렵다며 나에게 존댓말을 했고, 수민이는 자기가 빠른이니 누나라고 부르라고 반말로 하는 거 아닌가. 무슨 빛과 어둠도 아니고 상반되는 성격의 여성 둘과 같이 앉아 알바 시작도 안 했는데 숨이 막혔다.
암튼 나는 조용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혜원이에게 일을 배우고 싶었지만, 수민이는 자기가 일을 가르쳐야 한다며 바득바득 우겨 날 데리고 일을 가르쳤다. 일은 매우 간단했다. 오전, 오후 기자들에게 오는 편지들 분류, 기자들이 부탁하는 잡일, 가장 중요한 일은 지하 윤전기에서 매일 발행되는 다음날 조간 신문을 7층 건물 전체에 셋이서 구역을 나누어 배달하는 일이었다.
오후 5시가 되어 지하로 내려가 윤전기란 거대한 기계가 굉음을 내며 신문을 인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렇게 인쇄된 신문 한 부를 받아 품에 꼭 껴안았다. 눈을 지긋이 감고 이제 앞으로 여기에 내 기사가 실린다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야! 뭐해, 저기 포장된 거 분류해야지!”
수민이가 눈을 치켜뜨고 ‘얜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스타일 너무 싫다. 얘는 날 처음 봤는데도, 낯가림도 없다. 하고 싶은 질문도 다 한다. 질문도 웃긴 게, ‘연애는 해 봤냐’는 질문은 왜 하는가? 이미 연애를 못 해 본 사람이라 정한 거 아닌가. 사람의 편견(?)이란 참으로 무섭다. 그러나 정말 못 해 봤기에, 못 했다고 하니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낄낄대며 웃더라.
신문을 다 돌리면 저녁 7시까지 1명이 남아 기자의 심부름을 해주고 나머지 알바는 퇴근한다. 난 첫날이기도 하고 빨리 적응하고 싶어서 순번이 아님에도 당직을 자원했다. 혜원이는 괜찮다고 했지만, 수민이는 좋은 자세라고 엄지손가락을 척 들고 칭찬하며 가방을 빨리 싸면서 친구한테 전화하는지 통화하며 오늘 번개니 빨리 모이라고 말하며 바쁘게 가더라. 혜원이는 주저하며 가방을 싼 후, 퇴근하며 자기 번호를 가르쳐 주며 모르면 전화하라고 조용히 말했다. 이 섬세한 배려심에 감동하며, 떨리는 손으로 버튼을 눌러 저장했다. 혜원이가 가는데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90도로 인사했다.
홀로 남아 계속 회의하고 A4용지를 들고 이러저리 움직이는 기자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주시하며, 나도 ‘조만간 저 속에서 바삐 특종을 따기 위해 움직이겠네’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였다.
누군가 등을 ‘탁’치며 다정하게 말했다.
“새로온 알바에요?”
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등을 친 남성은 베시시 웃고 있었다. 그는 30대 중반 정도 나이로 보였다. 헤어스타일은 미용실 다녀온 듯 무척 깔끔했다. 2대8의 가르마를 했는데 숱이 많아 그런지, 머리카락이 풍성하여 단정해 보였다. 짙은 눈썹과 큰 눈이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위, 아래 감청색 슈트와 안에는 조끼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포인트로 빨간색 넥타이를 메고 있어 굉장히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정치부 소속 H기자였다. 국회 출입처 근무를 마치고 신문사에 복귀한 것이었다. 기자라 그런지 어색한 분위기를 역회전시키는 능력도 탁월했다. 곧바로 그는 나에게 친근감 있게 여러 질문을 했다. 그의 질문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호구 조사가 아니었다. 서로 가볍고 즐겁게 답하는 부담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다 그는 책상 위에 내가 읽던 책을 발견하곤 놀라며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아니!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
그는 진짜 몇 년 만에 루쉰을 읽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며 신이 나서 말했다. 그리고 루쉰에 대한 내 생각을 물었다. 순간 느꼈다. 이건 승부다. 칼을 들지 않은 진검승부라 할까? 서로의 수준을 파악하고, 거기서 맞상대가 된다면 대화가 이어진다고 판단했다.
그에게 나만의 루쉰론을 펼쳤다. 그는 내 루쉰론에 대해 어느 부분은 공감하고 어느 부분은 공감하지 못했다. 서로 대화가 된다고 느끼자 우린 눈에 보이지 않는 바둑판을 놓고 루쉰이란 흑과 백의 바둑알을 들고 한 수, 한 수 두며 자신만의 집을 만들고 상대의 공격에 집을 뺏기며 재밌게 대화했다.
난 침까지 흘리며 대화에 심취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민망해져려는 찰나, 눈치 빠른 그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며 뼈다귀 해장국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였다.
알바가 어찌 기자와 겸상을 하나란 생각에 주저했으나, 그는 여긴 알바 밥 사주면 특종 따는 징크스가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날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알고 보니 당직 알바에게 종종 기자들은 밥을 사주었다. 알바 시간이어도 기자가 데리고 가서 밥 먹는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는 굉장히 열린 조직이었다.
그와 밥을 먹으며 느낀게 있었다. 사람과 대화할 때 진심으로 듣고 있다고 알 때가 있다. 핵심은 리액션이다. H기자는 리액션을 참 잘했다. 나의 말에 뼈다귀를 뜯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오호’ 그러며 추임새를 계속 넣었다.
난 남자든, 여자든 리액션 좋은 사람에게 약하다. 처음 만난 날인데도 그의 리액션에 정신무장해제 되어, 고졸이지만 기자가 된 후 문학가가 되어 사람의 정신을 변혁하는 소설을 꼭 쓰고 싶다고 했다.
내 급 고백을 들은 H기자는 조용히 소주 한잔을 입에 털더니,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전 오랜만에 숨쉬는 대화를 하는 거 같아요. 맨날 서로를 증오하는 말만 내뱉는 소음같은 말을 하는 자들 속에 있으니 말이죠. 대화하면서 저에게 오버랩 되는 책이 있거든요. 괜찮다면 추천해도 될까요?"
아이고, 그럼요. 그럼요. 천권이든 만권이든 추천해 주셔도 됩니다요. 아마 술에 취해 혀가 꼬여 이리 말한 걸로 기억한다.
그는 날 데리고 밖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신문사로 데리고 갔다. 그와 함께 올라간 4층에는 신문사가 한 언론인을 기리는 도서관이 있었다. 이미 늦은 밤이라 도서관 직원은 없어지만 환하게 불켜진 도서관에서 그는 책장 사이를 비틀거리며 책을 열심히 찾았다.
마침내. 찾았다고 하며 내 손에 쥐어준 책은 『괴테와의 대화』였다. 그는 말했다.
"괴테에 대해 익히 알고 있을거라 여깁니다. 이 책은 에커만이 괴테와 만난 수천번 만남을 적은 책이에요. 괴테의 위대함을 알면 문학의 위대함도 알게 됩니다. 지금 노석씨는 괴테의 말 대로 한 없이 쓸수있는 내면 자본을 쌓는 시기에요. 한번 읽어봐요."
그는 술에 취해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괴테를 말할 때 딕션은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비틀거리며 그 책을 받아들고, 품에 꼭 안고 지하철을 탔다. 술에 취해서 정신이 왔다갔다 했지만 절대 이 책을 분실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더욱더 꼭 품에 꽉 안았다.
왜 그랬냐면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은 날카롭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지 겉치레인지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난 그에게서 날 위해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진심을 느꼈다.
부족하고 가난한 인생의 장점은 사람의 마음을 느끼는 감각이 단련된다는 점이다. 이득만을 생각하는 자는 나에게 친절도 베풀지 않는다. 왜냐 나에게 받을 수 있는 건 없으니 말이다. 나에게 친절했던 자들은 돈은 적게 주며 퇴근 시간이 지나도 일을 더 시키는 그런 자들이었다.
무엇도 줄 수 없는 나에게 진심으로 돌진하는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고맙다. 물론 이런 감각이 완벽하지는 않다.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를 외치는 사람의 따뜻한 거짓된 진심에 속아 커피값을 몇번 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다음날, 방에서 눈 떴을 때 괴테의 책은 머리맡에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그러나 방문 열고 호통치신 엄마를 통해 가방은 전철에 놓고 온 걸 알게 되었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게 난 어제 가관이었다. 문 비밀번호를 몇 번이나 틀린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셨다고 한다. 문을 열자마자 신발도 벗지 않고, 책은 품에 안은 내가 계속 뭐라고 외쳤다고 한다. 엄마가 석아, 뭐라고 그러는 거니 물어봤는데 내가 "개떼, 개떼"라고 했다더라. 엄마가 이 미친 놈아 뭔 개떼냐. 어디서 술 쳐먹고 오다가 개보고 놀랐냐라고 물어보셨다고 한다. 아마 내가 말한 ‘개떼’는 ‘괴테’였을 것이다.
여하튼 괴테를 씹어 먹겠다는 의지로 괴테와의 동기화를 위해 24시간 괴테 책만 들고 살았다. 알바 할 때, 혜원이와 수민이는 항상 노트북을 들고 와 대학교 과제를 하는지 뭘 하는지 키보드로 탁탁탁 치면서 바쁘게 타자를 쳤다. 노트북도 사람 성향 보여주듯이 혜원이는 아무런 꾸밈이 없는 검정색의 둔탁해 보이는 레노버 노트북이었고, 수민이는 은색의 맥북을 썼는데, 거기엔 화려하게 겉면에 여러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난 당연히 노트북이 없으니 괴테의 책만 열심히 독서했다. 항상 호기심 천국인 수민이는 왜 노트북을 안 가지고 다니냐고 물어보다가 내가 아예 없다라고 퉁명스럽게 답하면 너무 놀라며, 그럼 과제는 어떻게 하냐고 또 물어본다. ‘아니 대학을 자퇴했는데 과제가 있을 리가 있냐!’라고 말하려다, 너무 자세한 개인정보는 공개하기 싫었기에 과제도 없다라고 말하면 더 놀라며 우와 무슨 과여서 과제도 없냐는 등 괴테의 동기화에 버퍼링 걸리게 계속 질문했다. 혜원이가 옆에서 야 그만 좀 물어봐 그러면 아니 사람이 맞대고 앉아 있음 대화를 해야지, 대화를 이러면서 지칠 줄 몰랐다.
이럴 때 나의 구세주는 H기자였다. 수민이 질문에 버퍼링 걸려 어버거리고 있으면 상쾌하게 와서 우리에게 친근감 있게 대화해주고, 내가 든 괴테의 책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날 데리고 신문사 옥상 테라스로 데려가 괴테와 얼만큼 동기화 되었는지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먹으며 대화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신문사 4층의 책들 중 이러 이러한 책은 읽으면 좋으니 자기 이름을 말하고 대여해서 보라고 얘기하면서 이런 가이드 라인도 제시해 주었다.
”사람을 알기 위해선 시대도 필요해요. 어떤 시대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영웅도 될 수 있고, 평범하게 살았을 수도 있거든요. 역사를 좋아하니 잘 알겠지만 초한지를 보면 유방과 한신이라는 이런 인물들은 걸출하기는 하지만 시대가 그 사람들을 만든 것도 있거든요. 특히나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현대사에 대한 부분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죠. 그래서 더욱 그런 부분에 대해 찾아서 읽을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리영희 교수의 『대화』, 유시민의 책, 강준만 교수의 책, 박홍규 교수의 책 등을 소개해 주었다. 특히나 삼국지를 빗대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오의 손책이 임종 직전 동생 손권에게 남긴 유언은 ‘안의 일(내정)이 결정되지 않거든 장소에게 묻고, 밖의 일(군사·외교)이 결정되지 않거든 주유에게 물어라’라고 했어요. 전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안의 일이 궁금하면 강준만 교수의 책을 읽고 밖의 일이 궁금하면 박홍교 교수의 책을 읽으라구요.“
그의 말대로, 난 심심하면 4층 도서관을 찾아 그 분들의 책을 읽었다. 강준만 교수는 국내 정치비평에 대한 책이 많았고, 박홍규 교수님은 국내에 번역되지 못한 해외 주요 책을 많이 번역하신 분이었다.
H기자가 날 항상 데리고 옥상 테라스를 갈 때마다, 시샘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한 명이 있었으니 바로 수민이였다. 수민이는 유독 그가 와서 말을 걸면 입이 귀까지 찢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호들갑을 떨며 그와 대화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여성은 남성의 호감을 사기 위해 콧소리를 내는 비음을 낸다고 했었다. 난 그런 비음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 과연 그 소리가 무엇인지 항상 궁금했었다. 근데 수민이가 H기자와 대화할 때 ‘아! 저것이 비음이구나!’란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랑 대화할 때는 뭔가 가래가 섞인 탁한 목소리로 말하던 수민이가, 그와 대화할 때는 콧소리의 비음이 들어가며 엄청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더라. 암튼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치만 그가 나에게 대화 좀 하자며 데리고 나갈 때, 동물적인 직감으로 뒤통수가 뜨거워지며, 누가 나에게 칼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섬뜩함을 종종 느꼈다. 그래서 뒤를 확 돌아보면 수민이가 눈꼬리가 올라가 씩씩대며 노려보는 눈초리를 몇번이나 목격했다. 아니, 근데 시발 난 남자인데, 대체 뭘 걱정하는거야. 라고 속으로 읊조리며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 2편에서 이어집니다.
참고 문헌
1.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1, 2』, 민음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