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시생의 일기 (중)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 / 출판사 : 북스피어

by 노석

다노우에 고사쿠가 받았던 세상의 모멸을 쓴 문장 뒤의 감정들을 그 시절 뼈 때리며 느꼈다. 어떤 아이가 내 반찬을 집어 먹다가 결핵이란 소리를 듣자 내 얼굴에 반찬을 뱉었을 때, 교실 뒤로 가서 불량한 무리들에게 이유 없이 맞았을 때, 책을 잘못 꺼내 놨다고 발길질 당했을 때, 그런 기억들은 나에게는 강한 분노를 주었다. 일진과 그 패거리들을 죽이고 싶다고 매일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칼을 쥐지도 못할 정도로 힘이 없는 나약한 몸을 보며 분노를 한켠으로 밀어 놓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도 했다. 지난 시절 내가 괴롭혔던 그 친구의 심장에도 내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던가 하고 말이다. 그 얼마나 고통스러운 감정이었을까.


한 두마디식 나누던 그와 나는 점점 더 친해졌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면 아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흙바닥의 운동장으로 나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스탠드 구석에 숨어 앉아 있곤 했다.


다노우에 고사쿠는 신체적 불편을 상쇄하고도 남을 두뇌의 명석함이 있었다. 그도 어눌한 말과 다르게 두뇌가 명석했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넌....몇..년...간... 맞아...봤어?"

"난 지금이 처음이야. 이렇게 맞아 본적은 없었어."


고개를 숙이고 우울해 하는 나에게 그는 벌어진 입을 하늘로 들고 낄낄대며 웃었다. 이 놈이 실성했나 해서 쳐다보니 웃던 그는 별안간 진지한 눈빛으로 나에게 조언해주었다.


난 맞고 지내온지 햇수로 5년은 넘는다. 맞을 때는 소리를 크게 질러라. 그러면 때리는 놈들도 들킬까봐 혹은 조금 양심의 가책을 받아 조금만 때린다. 그리고 상황을 봐서 바닥에 자연스럽게 쓰러져라. 버티고 서 있으면 괜히 더 때린다. 아! 그리고 너는 결핵으로 기침을 많이하니 맞으면 격하게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라. 그리고 시비를 걸면 못 들은 척 멍청한 표정을 지어라. 그러면서 나를 툭 치며 자신의 표정을 보라고 손짓을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표정. 시선은 먼 산을 보고 있고, 입은 벌린 채 침이 나올까 말까 아랫입술을 경계 삼아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가 아기나 귀여운 강아지를 때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왜 너무 귀여우니까! 그런데 그때 그의 표정은 귀엽기는 커녕 진심으로 명치를 정말 때리고 싶은 표정이었다.

내가 정색을 하며

"야, 때리고 싶은데"

라고 말하자. 그는 조금 고민하더니 표정은 변수가 많으니, 이건 패스하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못 들은 척 연습하거나, 기분 안 나쁘게 쳐다보는 법, 동정심을 얻을 수 있는 제스처, 서로 툭 건드려도 쓰러지는 연습을 했다. 정말 누가 봤으면 '병신 커플'이라 불릴 만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연습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할까? 그의 가르침데로 맞는 비율이 현저히 감소했다. 그리고 때린 아이들이 가면 우린 프로 연기자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서 먼지를 털고 자리에 앉았다.


더운 여름 운동장 그늘에 앉아 무언가를 읽는 그에게 난 물었다. 비참하지 않냐고.


고사쿠는 에나미라는 절친을 통해서 모리 오가이라는 소설가를 알게 된다. 또한 에나미의 도움으로 장서들의 자료 조사를 하게된 고사쿠는 그 일을 몰두하던 중, 그 자료 조사 방법을 통해서 그때 당시 분실 상태에 있었던 모리 오가이가 '고쿠라'에서 지낸 3년간의 일기 '고쿠라 일기'를 보완해 보자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그 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집념을 불 태우던 고사쿠는 종종 일어나는 '이 작업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에 괴로워한다.


비참하지 않냐는 나의 질문은 우리가 남몰래 연습했던 루저 행위에 대한 근본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고사쿠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고 괴로워했던 것처럼 내 질문은 그에게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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