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레지 Apr 16. 2024

여전히 소녀들의 파라다이스

솔직히 말해, 겉모습을 꾸미는 데 큰 흥미가 없다.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그만한 품을 들이는 행위가 너무나 귀찮기 때문이다. 단순한 옷을 여러 벌 사서 교복처럼 돌려 입기만 하는 게 전부인 나지만, 각자만의 개성을 살려 치장한 사람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부터 방향만 다를 뿐 결은 비슷했던 것 같다. 여아를 대상으로 한 매체를 굉장히 좋아했다.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나와서 화려한 옷을 입고 마법을 부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에 막연한 동경을 줄곧 품으며 살아왔으나, 내가 딱히 무대에 오르는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이 대리만족 욕구를 각종 패션 코디네이트 게임에서 충족하고는 했다. 마침 눈부신 기술의 발전과 함께 자라온 세대이기에.


 시작은 ‘쥬니어 네이버’나 ‘야후 꾸러기’, ‘다음 키즈짱’ 등에 존재하던 플래시 패션 게임이었다. 그 시절 문구점에서 판매하던 스티커처럼 고정된 자세의 여자아이에게 정해진 옷을 입히던 수많은 게임. 게임 방식이 간단하고 편리했지만, 입힐 수 있는 옷의 범위가 좁았고 자세가 늘 그대로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던 와중, 세상에 ‘프리파라’라는 게임이 등장해 나를 반겨주기 시작했다. ‘프리파라’는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오락실 등지에 게임기를 설치하여 플레이하는 아케이드 게임이다. 캐릭터를 취향대로 꾸미고, 수많은 종류의 옷을 입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캐릭터가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까지 감상할 수 있는 게임은 어린 내게 천국과도 같았다. ‘프리파라’의 캐치프레이즈인 ‘소녀들의 파라다이스’라는 말이 꼭 맞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소녀로 남을 수는 없는 법이다. 순식간에 자라버린 나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 그런 게임을 즐기기 어려워졌고, 현실에 휩쓸려 미래를 생각해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다. ‘프리파라’를 하며 모았던 코디 티켓들을 구석에 밀어 넣고 서랍을 닫아버린 것처럼, 천국과는 이제 작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내게는 야간 자율학습을 빠지고 어디로든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하루는 대형마트와 연결된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집으로 가기 위해 천천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길, 나는 오랜만에 낯익고도 생경한 풍경을 보았다. 늦은 시간이기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던 나의 옛 천국. 마침 주머니에 남아 있던 잔돈은 나를 홀린 듯이 ‘프리파라’에 이끌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던 것들이 가득했다. 아무리 현실이 슬프고 괴로워도 내가 좋아하던 것이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것이, 그 사실이 왜인지 굉장히 위안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특별히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일상은 버거웠고, 학업에는 영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마음이 공허해질 때면 나는 늦은 밤에 꼭 ‘프리파라’를 찾았다. 한참 동안 어린 시절의 나의 편린을 되짚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가슴 설레는 것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삶은 언제나 천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시절의 나는 아마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작가의 이전글 슈의 추억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