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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inijini Dec 28. 2023

난이도 최상, 하지만 즐거움도 최상의 유학생활

감자 삶아먹는 보릿고개(?)에 알바, 매일 그날 배운 표현 써먹기 챌린지

이상주의자 vs 현실주의자 중에 어느 쪽에 해당하는가? 를 묻는다면 나는 0.5초 만에 '현실주의자', 그것도 '극 현실주의자'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유학생활도 '두근두근 항상 새로운 일,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환경'이라는 기대감보다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퀘스트 천국의 생존게임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유학생활 당시에도 '할 수 있어!'라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깨 나가는 느낌으로 최선을 다했고, 지금도 누군가 물어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던 때'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처음 일본에 이민가방 수준의 짐을 들고 출국하던 날, 남들은 짐이 많으니 바로 써야 하는 것들만 캐리어에 넣고 나머지는 집에서 EMS로 보내곤 했는데 나는 EMS값 대신 목걸이를 받았다. 떠나기 전, 엄마가 항상 차고 있을 좋은 18k로 된 목걸이를 사주셨고 그 목걸이를 EMS값 대신이라고 서로 합의를 했다. 당시에는 눈앞의 목걸이가 너무 예쁘고 좋아서 그래 내가 다 들고 가면 되지 뭐라고 생각했지만, 공항에서 짐 붙히기/짐 찾기/기숙사방까지 가져가기 는 역대급 헬이었다. 학교 기숙사를 들어가는 길이 약 100개 정도의 엄청난 경사의 계단을 내려가야 하고 한참을 끌고 가야 하는 길이어서 20킬로가 넘는 캐리어에 상자에 모든 걸 쌓아 이고 지고 가며 아 이렇게 짐만 끌다 유학생활은 1도 못해보고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진짜로 나는 약 일주일간 몸살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첫 외국생활은 내 상상처럼 진짜 녹록지 않았다. 일본물가도 모르고 첫 자취에 돈이 어떻게 드는지 부모님도 나도 몰랐기 때문에 일단 한국돈 약 30만 원, 당시 환율이 갑자기 1600엔까지도 뛰던 시절이라 약 2만 엔~2만 5천엔 정도를 한 달 용돈으로 받았었다. 친구들은 일본생활 그리고 첫 자유를 만끽하러 시내에 나가서 놀거나 스타벅스에서 커피 마시고 노래방을 다니며 즐거운 생활들을 했지만, 나는 한번 시내에 나가면 교통비+밥값+노는 유흥비로 너무 큰 용돈지출이 생기기 때문에 되도록 시내 나가서 놀기보다는 기숙사에서 일본친구들과 전자사전을 쓰며 꾸역꾸역 대화를 하고 놀았다. 일본 친구들과 방에서 알 수 없는 수다를 떨거나 생일파티를 하고, 잘 못 알아 들어도 공용부엌에 앉아 친구들 대화를 들으며 괜히 친구들이 웃는 타이밍에 허허 웃으며 기숙사에서만 항상 놀았다. 


기숙사에서의 파티

 다른 한국인 친구들처럼 시내를 돌아다니며 놀아보지 못했다는 후회는 전혀 없고, 난 매일 일본인 친구한테 연습하고 그날 배운 단어를 노트해 놓으며 문장을 써보고 하는 게 더 즐거웠었다. 영어기준으로 입학은 했지만 잠깐이라도 유학을 했거나 적당히 영어를 잘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나는 수능영어만 하다 달달외운 스크립트로 합격을 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그 친구들보다 누구보다도 일본어를 빨리 배워 능통해지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 목표 덕분인지 하루하루 일본친구들과 즐겁게 놀며 한 문장 한 문장 할 수 있게 되는 그게 너무 즐거웠다. 


 사실 일본에 오기 전 어린 나를 혼자 보내는 것이 걱정된 엄마가 언니 친구를 통해 일본과 학교생활이 어떤지 이것저것 들은 적이 있는데, 이때 우리 학교에 와서 적응하지 못하고 반년만에 돌아간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들었었다. 나도 적응을 못하지 않을까 힘들지 않을까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봐 좀 더 독하게 열심히 버텨야지 생각했었다. 실패한 유학생활, 힘들어서 돌아온 딸이 되고 싶지 않아 잡생각이 들 틈도 없게 치열하게 살았다. 1학년때도 가끔 그 달 용돈이 부족하면 점심으로 간단하게 감자를 삶아 먹거나, 잠깐 방학(우리 학교는 한 학기를 2번으로 나누어 쿼터로 보냈기 때문에 쿼터 브레이크가 있었다)에는 학교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동물원 안에 있는 슈크림빵집에서 주방 설거지 알바도 했다. 지금 이렇게 보면 너무 힘들고 우울했을 것 같지만, 사실 당시에는 캠퍼스 풍경을 보며 바람도 쐬며 감자를 먹는 낭만, 처음으로 내가 돈을 벌어보는 기쁨을 다 느끼며 나 스스로도 내가 성장해 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확실히 다른 친구들보다 일본어를 빨리 배우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되어 1학년 2학기때부터 누구보다 이른 시기에 일본어 전공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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