農夫餓死枕厥種子(농부아사침궐종자)
'농부아사침궐종자'라는 말이 있다. 종자는 다음 해에 파종을 해 농작물을 키워야 하는 근본이기 때문에 농부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종자는 지킨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는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종자를 포기하지 않았다. 백성들을 혹독하게 착취하는 정부나 탐관오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야반도주를 할 때도, 나라 잃은 설움에 왜의 손길이 적게 미치는 만주로 떠날 때에도,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먹을 것 없는 허허벌판으로 쫓겨날 때도 우리의 선조들은 종자를 담은 씨주머니를 포기하지 않았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밭을 갈고 파종하고 있다
씨주머니
근세까지 농부들의 삶은 녹록지가 않았다. 적은 농토에서 생산한 곡식으론 한 식구가 살기에도 빠듯했는데 도지로 나가고, 나머지도 이런저런 명목으로 떼이고 나면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산으로 들로 다니며 나물과 풀뿌리로 허기를 채워야 했다. 그러면서도 농부들은 종자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종자를 먹어 없애면 다음 해의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종자를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농부들은 볏짚으로 새끼를 꼬아 작은 항아리를 만들고 그곳에 종자를 넣어 보관하였다. 투박한 새끼 항아리 안에서 종자는 한해를 버텨내고 매년 싹을 틔워 농부의 희망이 되었다.
세상을 살면서 씨주머니에 넣은 종자처럼 절대 포기해서는 안될 것들이 있다. 인생의 종자이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찾아야 하는 종자는 천차만별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씨주머니 안에는 어떤 종자가 들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종자를 확인하는 것만큼 늘 살펴보고 잘 간수해야 할 것이 씨주머니이다. 씨주머니에 습기가 차거나 망가진다면 그 안에 있는 종자들도 금방 훼손되거나 뿔뿔이 흩어져 찾을 수 없게 된다. 어찌 보면 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씨주머니이다.
오늘은 각자의 씨주머니를 살펴보자.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씨주머니는 다르다. 누구는 비닐봉지 한장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견고한 나무로 짠 상자를 씨주머니로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각자의 씨주머니가 그 사람의 인생을 지배하게 된다.
나의 씨주머니는 걷기이다. 걷기를 통해서 내 삶의 의미를 찾고 걷기를 통해 자연생태계를 마주한다. 걷기 안에서 기쁨도, 슬픔도,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새 힘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겐 종자만큼이나 씨주머니도 중요한 것이다. 씨주머니는 미래를 품은 꿈의 저장고이다. 씨주머니 안에 있는 종자들은 좋은 땅을 만나 뿌리를 내리고 오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어 준다.
오늘, 당신의 씨주머니는 무엇인가?
고양시에 있는 가와지볍씨 박물관에서 볏짚으로 만든 씨주머니와 마주했다.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기쁠 때는 무엇이든 많이 소유하고 있을 때보다 적은 양이라 해도, 꿈과 기대감을 지니고 있을 때이다. 당신의 씨주머니가 작고 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씨주머니 안의 종자들이 어떤 씨들인지, 씨주머니는 그것들을 잘 품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고양시 가와지 볍씨 박물관 내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