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열면 보이는 것들, 섬마을 선생님

by 물냉이

파도가 조금씩 높아지는 바닷가를 걷다 붉게 익은 해당화를 마주했다. 가을이면 나무에 달리는 붉은색들은 농염이 된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따서 드세요. 반질거리는 이 붉은 껍질 안에 당신을 즐겁게 해 줄 맛있는 속살이 있답니다. " 잘 익은 해당화 열매 한 개를 따서 먹어 본다. 물컹 씹히는 열매가 터지며 노란 속살이 입안에 퍼진다. 촉감이 약간 덜 익은 감의 속살을 떠오르게 한다. 계속 씹으니 은근한 단맛이 배어난다. 해당화 열매는 기와 혈을 잘 돌개 해주고, 진통효과와 종기를 제거하는 효능이 있는 약제이기도 하다. 우리 땅에서 나는 많은 식물들이 한약재로 약효가 있기는 하지만 비타민 C의 함량이 높고 폴리페놀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니 몇 개 따다 집에서 먹을까 하다 집에 가면 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 금방 포기한다. 그 자리에서 이쁜 모습 보고 그 맛도 보았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19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후략)


박춘석이 작곡하고 이미자가 노래한 '섬마을 선생님'은 1960년대 나라를 들썩이게 휩쓴 노래이다. 해당화라는 식물을 사람들의 입에 익숙한 식물로 만든 것도 다 이 노래 덕이다. 그 시대 사람이라면 "19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 하는 가사를 흥얼거리며 따라 하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노래 '섬마을 선생님'은 인기를 업고 김기진 감독에 의해 '섬마을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남정임, 윤정희와 함께 원조 트로이카 여배우로 불리는 문희가 오영일과 주인공으로 출현한 영화이다. 현재 미국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오영일은 1967년 김기덕 감독의 '원죄'라는 영화로 알려지기 시작한 배우이나 문희처럼 지금까지 명성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한때 신성일을 위협하는 배우라는 평을 들었다니 그의 인기를 가늠해볼 뿐이다.


20211014_133816.jpg


방송을 보면 누구는 어떻게 인생을 성공하고, 어떤 이는 부자가 되어 열전에 소개되고 그러는데 나는 어떻게 익어가는 걸까 생각해보면 내어 놓을 만한 게 없다. 남들이야 어떻게 평하던 내 인생을 열심히 살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는데, 해당화 열매 하나에 그 알량한 자존심이 아이들 젖니처럼 흔들거린다. 내가 무능한 걸까? 해변의 해당화는 한그루가 아니고 길게 가로수처럼 식재된 해당화에 붉게 달린 열매도 이곳저곳 붉게 달려 있다. "그래, 나의 삶이 아직은 덜 익었을지는 몰라도, 벌레 먹거나 썩지는 않았을 거야." 이제 조금씩 해당화 열매에 광이 나듯 내가 배우고 익힌 것들을 반질거릴 수 있도록 닦아 보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때가 되면 푸른 잎 뒤에 숨어 있던 초록의 해당화 열매는 붉게 변하며 앞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뭐 특별히 잘난것 없다 해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를 위축시킬 필요도 없다. 누군 가는 나의 삶을 인정해주고, 함께 하고 싶어 하거나, 나의 행동들에서 배우길 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되는 거다. 해당화 열매들이 햇빛에 반질거리며 빛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조금 열면 보이는 것들, 들깨밭을 지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