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성과 해학의 해신당

29코스 :호산버스터미널-용화레일바이크역.18.3km

by 물냉이

해파랑길 29코스는 호산항에서 임원항까지 옛 7번 국도를 따라간다. 자칫 지루한 산길일 수 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마침 내려준 눈이 반쯤 녹으면서 촉촉해진 숲과 나무를 보는 행운을 만났다. 임원항에서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수로부인헌화공원을 방문해 보는 것이 좋다. 임원리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산길은 임원천을 따라 걷는 길로 특별한 자원을 만나지는 못한다. 용화리의 100년 넘은 아까시나무는 우리 땅에 자리 잡은 외래수종의 고목을 본다는 의미가 있다. 임원리에서 바닷길을 따라 걸으면 갈남리의 해신당공원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바다와 곰솔숲이 함께 어우러져 빚어낸 해안의 절경 또한 빛나는 곳이다.

눈이 빚어 놓은 세상 속에서(호산 버스터미널-임원항)

진눈깨비가 눈으로 내려 떡가루를 묻히듯, 설탕물을 입히듯 세상은 달콤하고 맛있게 변해버렸다. 밤길을 걸은 탓에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나 북북 무언가 긁어내는 소리에 잠이 깼다. 창문 밖에는 누군가 가래를 밀며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저 너머 보이는 가스저장소도 불을 끄지 못하고 밤을 새우고 있었다. 한참을 눈 쓰는 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밤은 소리로 잠을 깨우고 불빛으로 자극하며 여행자를 잠 못 들게 하였다.


부은 눈으로 거리를 나서니 어제 내린 눈이 쌓인 거리는 빙판이 되어 걷기가 힘들었다. 등산화가 아닌 워킹화는 이런 빙판길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한다. 미끄러운 마을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호산감리교회의 안마당은 나뭇가지에 쌓인 눈으로 꽃밭이 만들어졌다. 이럴 때면 나도 마당 있는 집이 부럽다. 풍경은 좋았지만 문을 연 식당이 눈에 안 띄어 그냥 마을을 떠나 걸어야 했다. 차들이 다닌 자리는 눈이 녹았지만 도로의 가장자리나 인도는 아직 눈이 쌓여있어 미끄러워 걷기가 힘들었다. 걷는 걸음의 숫자만큼이나 앞을 내다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새벽 네 시도 안된 시간에 누군가 눈을 가래로 치운다. 부지런한건 좋은데 그 덕에 내 잠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아침에 멀리 불난 것 처럼 보이던 산은 별 탈 없이 서있다.

호산감리교회 입구의 나무들이 눈꽃을 피웠다. 이런 곳에 솔잎 눈썹을 한 눈사람 하나 서있으면 정말 반가울 거 같은데
거리는 녹았지만 인도는 꽁꽁 얼어붙어 걷기가 힘든 길을 따라 걷는다. 그 와중에도 원덕고등학교 교문 옆의 능수버들은 짙은 화장을 한 듯 눈으로 치장하고 있다.

옥원 삼거리 입구에서 옥천리 맹두골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곡천을 따라 난 도로를 따라간다. 이쪽은 인도가 설치되어 있거나 동해안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어 비교적 안전하다. 두 길은 곧 다시 만난다. 이 구간은 바닷가에 넓게 자리 잡은 한국 남부발전으로 인해 해안을 접근할 수 없어 우회도로를 따라가는 것이어서 특별히 눈에 띄는 역사나 문화자원도 없고,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안전에도 신경이 쓰이는 길이다. 그래도 어쩌랴 해파랑길에 이런 구간이 한두 곳이 아니니 참고 가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해파랑길에 산업단지, 호텔, 공적기관 같은 자연을 훼손하는 시설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남부발전의 입구가 있는 언덕길을 걸을 때쯤 아침 햇볕이 비치면서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다니, 즐거움과 감동은 멋진 경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순간을 찾아내고 즐길 줄 아는 이들에게만 혜택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길가의 소나무에 쌓인 눈들은 해가 뜨면 빠른 속도로 녹아 내린다. 부지런히 아침을 걸은 덕분에 볼 수 있었던 기분 좋은 순간이다.

노곡항의 앞바다가 가까이 보이는 노곡 삼거리에 도착했을 즈음 햇볕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장소에 따라 다르게 녹는 눈은 거리에 멋들어진 눈의 나라를 만들어 주었다. 한참을 눈에 감싸인 숲과 나무에 감탄사를 쏟아내며 걸었다. 이런 것이 '길섶에서 주은 행복'이지 않을까. 한 시간 정도 눈이 펼쳐놓은 겨울왕국의 세계를 감상하며 걷다 보니 저기 수로부인 헌화공원을 오르는 엘리베이터 탑이 보인다. 임원항이다.

눈이 만들어 놓은 풍경
바다와 노곡항이 눈 내린 배경으로 더 아름답게 보인다.
눈내린 풍경을 감상하며 길을 걷는 즐거움은 지루한 길에서 느끼는 최고의 혜택 중 하나이다.
멀리 임원항의 수로부인 공원이 있는 남화산과 공원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해신당의 바다(임원항-해신당공원-갈남항-장호리-용화 레일바이크 역)

임원항이 있는 원덕읍 임원리는 과거에 여행자들이 묵어갈 수 있는 만년원(萬年院)이 있었다고 한다. 수도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한참 먼 거리기에 이런 숙소가 여행자들에게는 무척 필요한 장소였을 것이다. 임원항의 뒤편에 있는 남화산은 수로부인의 헌화가에 나오는 벼랑에 핀 꽃이 있던 장소로 수로부인 헌화 공원이 들어선 이유이기도 하다. 임원리의 편의점에 들러 간단히 컵라면과 김밥 한 줄로 아침을 해결했다. 여유를 갖고 천천히 다시 걷는다. 임원천 가에 있는 임원리 큰서낭당에는 눈 맞은 소나무가 호위무사처럼 서낭당의 입구를 지키고 서있다. 임원리에는 마을 안쪽에 할배서낭당인 큰서낭당이 있고 바닷가에는 할매서낭당인 정씨서낭당과 고씨서낭당이 있다. 이 서낭당은 원래 임원초등학교 옆에 있던 것인데 학교를 지으며 한번 옮겼다가 2006년 이곳으로 다시 옮긴 것이다. 임원리의 서낭당은 짐대가 유명하기도 한데 강릉시 강문동의 진또배기와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그 조형미가 아름다웠으나 이곳에서는 갈매기라고 부르는 새가 삭아 떨어져 기둥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기둥에는 붉은색과 검은색의 띠를 돌아가며 그려 놓아 마치 용이 감싸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였는데, 이곳을 찾았을 땐 짐대의 기둥도 볼 수 없었다. 짐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솟대를 말한다. 짐대의 역할은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막는 것으로, 짐대 위의 세 마리의 새는 각각 불과, 물,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준다. 임원항의 짐대가 사라진 것은 어업을 주업으로 하는 주민들이 감소하고, 서낭당에 관심 있는 주민들의 노쇠화 같은 변화와 관계가 있다. 그래도 서낭당의 기둥 한편에 물고기나 사탕, 술 등을 바친 것으로 보아 아직도 이곳을 꾸준히 찾고 관리하는 이들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89년 무렵의 짐대 사진 (출처:이해를 돕기 위해 삼척시청의 자료를 재인용함)

임원 2리의 500년 된 향나무 보호수, 그 아래 의자를 놓고 그늘을 맛보는 호사를 누렸던 이는 누구일까


눈 덮인 소나무가 서있는 사이로 서낭당이 보인다. 할배서낭당에 제물로 바친 오징어의 모습

서낭당을 나와 임원천을 건너면 원래의 해파랑길은 좌측의 임원 3리로 들어가 임원천을 따라 상류까지 올라간다. 차들이 띄엄띄엄 다니는 길을 따라 삼척의 농촌과 산촌을 만날 수 있으나 겨울철에는 딱히 이곳에서 눈에 띄는 매력물을 만나기는 어렵다. 개울을 따라 형성된 소규모의 논들과 가끔씩 잘 자란 삼척의 소나무숲을 만나는 정도이다. 과거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우거진 숲에서 호랑이와 산적들을 자주 만나 여러 명이 모여 고개를 넘었다는 아칠목재에 오르면 멀리 동해바다가 보인다. 도로공사로 인해 어지러운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용화리에 1982년에 수령이 100년 되어 보호수로 지정된 아까시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마을에 수로부인길 안내판과 함께 해파랑길 안내판이 있다. 그러나 이 길은 벌써 여러 번 걸어 보았으므로 과감히 바닷길을 선택한다.

해파랑길 29코스의 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길가의 소규모 논과 수로부인길을 안내해주는 장승
아칠목재에서 바라본 동해바다와 용화리의 100년 넘은 아까시나무 보호수, 그리고 해파랑길과 수로부인길의 안내판

해파랑길 29코스의 바다 쪽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임원천을 건너 직진해서 가면 된다. 구 7번 국도인 이 길은 지금도 가끔씩 차들이 지나다니며, 곰솔과 소나무로 이루어진 숲이 길옆으로 펼쳐진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끔씩 바다를 볼 수 있는 곳들이 있어 지루하지는 않다. 구도로가 새로 생긴 7번 국도와 교차하여 다시 바다 쪽으로 나가게 되는 구간에 이르면 저 멀리 해신당공원이 있는 신남항과 산자락이 보인다.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구 7번 국도를 따라 걷다 보면 길가에서 동해안에 자생하는 향나무를 자주 만나게 된다.

해신당공원이 있는 신남마을은 두 곳에 서낭당이 있는데 마을 입구의 산자락에는 남서낭인 엄씨할배를 모시는 서낭당이 있으며, 해신당공원 안의 바닷가 절벽 위에는 여서낭을 모시는 해신당이 있다. 해신당은 전설과 함께 남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유명 관광지이다. 해신당은 미역을 따러 마을 앞 바위까지 갔던 처녀가 물에 빠져 죽으면서 마을의 물고기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었는데 그녀가 꿈에 나타나 자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 달라고 해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내주면서 고기가 많이 잡히게 되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해신당에 남성의 성기를 만들어 바치는 곳은 강원도 고성의 문암진리, 강릉의 안인진리 그리고 삼척의 갈남리 등 세 곳이 있다. 해신당공원은 해신당을 중심으로 어촌민속전시관과 남근조각공원을 함께 조성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해신당 공원의 입구에 나무둘레가 2.7m에 이르고 수령이 500년이 된 향나무가 있다. 향나무는 향을 지니고 있어 깎아서 제사에 사용하는 것으로 남근을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나무이기도 하다. 바닷가에 많은 곰솔도 목재가 단단하고, 잎이 억세 남성성을 상징할 수 있지 않을까? 해신당 가는 길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다양한 형태의 남근 조각물들이 세워져 있는데, 이들이 성을 너무 희화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성의 해학적인 면만 강조하기보다 다양한 형태의 문화나 역사를 함께 녹여냈다면 어땠을까. 어촌민속전시관에서 어촌문화를 다루고 있는 것이 그래도 위로가 된다.

마을 입구의 할배서낭당과 해신당공원의 입구. 500년 된 향나무는 해신당의 역사와 함께한다.
해신당공원과 해신당에 모셔진 여서낭상, 서낭당에 걸린 남근


삼척어촌민속전시관 안에 있는 민속 전시물과 남근조각공원의 전시물, 해신당의 여서낭은 캐릭터로 만들어져 관광에 이용되고 있다.


해신당공원을 나와 도로를 따라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마을 앞에 월미도라는 바위섬이 있는 갈남항이 나온다. 햇빛이 많은 곳으로 환하고 깔끔한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을과 조개사 입구를 지나 곰솔과 바닷가의 바위들이 멋들어진 경관을 형성하는 장호리에 이르면 장호리에서 용화리를 연결하는 삼척 해상 케이블카 시설이 눈에 들어온다. 움푹 들어간 물그릇 형태의 장호해변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붉은색의 케이블카를 따라 천천히 용화리로 향한다. 개인적으로 삼척 해양 레일바이크가 있는 용화해수욕장을 29코스 바닷길의 종점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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