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안 하니 할 말이 이리 많다.
비가 내려 근래 중 조금 시원한 날이다. 이런 날에는 밖에 가만히 앉아 있기 좋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무념무상 퍼질러져 있던 털북숭이를 불러내 함께 옥상으로 올라온다.
옥상에는 할머니와 엄마가 어설프게 가꿔둔 정원이 있다, 정원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악해서 그냥 풀밭이라 해야 하나 싶지만.
키 작은 초록 뒤 울타리 사이 구멍 뒤로 느슨하게 시선을 맞추면 먼산이 보인다. 동서북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처럼 앞뒤로 산이 보이는 위치는 드물다.
커피의 씁쓸함과 온기가 잠이 덜 깨 찌뿌둥한 몸을 깨우기 시작하면 소리가 들려온다. 간지럽게 떨어지는 빗소리, 산새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 이 동네에서 20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생전 처음 듣는 새소리가 있더라. 내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늘어져 있던 털북숭이도 생소한 새소리에 잠시 고개를 든다.
아무 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 문장이 떠오른다. 귀하다, 이런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