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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늘 Jan 22. 2024

친구, 내가 선택한 가족

  20여 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하는 초창기 한두 해까지 만나던 친구였다. 고 3. 할 일이, 해야 할 일이 공부밖에 없던 시절, 그 답답하고 숨 막히던 매일의 날 들 속에서 우리는 같이 웃고 수다 떨며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내가 가는 길에 네가 있고 네가 가는 길에 내가 함께할 것이다.’라는 오글거리는 문장을 손 편지로 주고받던 친구.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멀리 산 중턱에 있던 학교에서 시내 중심에 있는 집까지 3시간 가까이 비 맞으며 걷던 기억. 공부하러 독서실 간다고 집을 나서서는 독서실 근처 놀이터에 앉아 밤늦도록 수다 떨던 친구.     

그 친구를 20여 년 동안 못 보고 못 만나고 살았다.

대학 졸업 이후 전쟁처럼, 폭주 기관차처럼 정신없이 다가오던, 쉴 틈 없이 내 앞에 펼쳐지던 삶의 계단들. 그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느라 난 정신이 없었다. 취직, 결혼, 출산, 육아, 여러 번의 이사, 이후 대 여섯 번의 수술과 투병.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삶의 파고들에 몸과 마음이 들려졌다 뉘어졌다 하다 이제 겨우 썰물이 된 해변에 다다른 느낌이다.  

      

 핸드폰을 바꾸고 이사를 가고 하면서 친구와의 연락은 끊겼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10대 때의 친구랑 나누었던 계산 없는 우정에의 기억도 사라지고 그런 친구의 필요성도 못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는 친구를 잊었고 세월의 떼를 묻혀가기 시작했다.

친구 관계엔 분명히 시간과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 친구도 나도 각자의 삶에 코 박혀 허우적대느라 그렇게 서로의 가는 길에 반드시 같이 있을 거라고 맹세하던 친구의 존재는 어느새 저 수평선만큼이나 멀리 나 앉아버렸다.

     

결혼 이후 생긴 새로운 가족들, 직장 생활하면서 만나는 동료들, 이어지고 생겨나는 일상 속의 수많은 관계. 그 그물들 속에서 발버둥 치느라 나의 에너지는 점점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영혼 없는 미소와 덕담을 습관처럼 주고받던 직장 동료들. 여행지에서의 근사한 사진을 올리며 근황을 알리는 SNS상의 지인. 빙빙 돌려가며 얘기해도 결국엔 자식 자랑인, 모임의 또 한 지인. 건강이 정말 중요하긴 하지만 남은 인생에 건강밖에 없는 듯 온갖 건강 상식 보따리를 끊임없이 풀어대는 은퇴한 선배.

나이 들어가며 모든 관계를 손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사실 어정쩡하게 발 담그고 있는 관계들이 내 스트레스의 하나가 되어갈 즈음, 나는 그 친구가 너무도 보고 싶어졌다.


왜 새삼스레 이제 와서?

너무 오랜만에 만나면 얼마나 어색할까?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는데?

세월에 스러져 내 늙고 별거 없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그녀가 혹시 엄청 부자거나 잘 나가는 사람이 되어서 나와는 딴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어디선가 잘살고 있겠지.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이제 만나면 더 어색할 거야. 그동안 서로 찾으려고 연락 못 한 미안한 마음도 각자에게 있을 거고...   

   

친구가 보고 싶다는 한 가지 마음 옆에 무슨 마음들이 그리도 구질구질하게 들러붙어있는지 세월의 떼가 두텁게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것들에 무덤덤해지는 나이에 누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랜만에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아직 연락이 닿는 고등학교 친구를 통하여 수소문하고 여러 다리를 걸쳐 천신만고 끝에 그 친구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연락 번호를 받아 들고 핸드폰에 저장하며 나는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막상 전화를 하려니 살짝 걱정, 아니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20여 년의 공백, 그 긴 시간의 강을 무슨 말로 건널 수 있을까?


010.... 번호를 누르는 내 손이 사뭇 떨리고 있었다. 신호음..

“여보세요?”

 전화기에 응답하는 목소리.. 와! 똑같다. 하나도 안 변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한가득 밀려오며 나는 그다음 응답을 못하고 계속 머뭇거렸다.

“여보세요?”

맑고 카랑한 약간 높은 톤의 친구의 목소리가 그 시절 그 톤 그대로 20년의 세월을 단번에 건너뛰어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나야.. 하늘이”

“아!... ”

그 친구도 할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게 얼마 만이지?”

“그러게. 잘 지냈어?”

“응, 넌?”

“나도.”

20여 년 만에 연결된 친구의 존재. 이틀 만에 통화한 것 같은, 엊그제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너무 다행이다 싶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반가움, 낯설지 않음, 그런 것들과 함께 문득 20여 년 전의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근거 없는 기대감, 겁 없는 정의감, 그리고 우울감과 불만 따위로 가득 찼던 그 시절의 느낌들이 아득히 기지개를 켜듯 올라왔다.


“보고 싶다. 친구야.”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살아있었구나. 어디 먼 나라로 이민 같은 거 안 가고 같은 하는 아래 이 땅에서 살고 있었구나 하며 나는 편안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며칠 후 만난 친구. 중년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는 친구의 몸은 살이 올라있었고 길었던 머리는 우아한 컬이 잡힌 짧은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목소리는 정말 하나도 안 변했다. 10대 20대 그 시절 그대로의 울림과 색깔로 나를 반겨주었다.


결혼 이후 사업하는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멀리 지방으로 이사 가게 되었고 그 이후 출산과 육아, 남편 사업의 실패 등, 친구도 정말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었다. 서로의 가는 길에 같이 있어 주마하고 약속했던 오래된 친구마저 잊고 지냈던 시절. 그 공통의 시간에 대한 이해는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우리는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사실 그 친구와 나는 성향이랄까 성격이 많이 다르다. 친구는 다소 외향적이고 시원시원한다. 결단력과 추진력 같은 게 남다르다. 목소리도 크고 자기주장 뭐, 그런 것도 강하다.

나는 내향적이고 소심하고 결단력도 없다. 뭐 결정할 때 이것저것 고민하고 고려하느라 날 밤을 새우는 답답한 스타일이다. 너무도 다른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이 같았다. 그건 지향하는 삶의 유형 즉 가치관 같은 게 같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성격은 달라도 좋아하는 삶의 결과 색깔에 대한 공통점이 우리 둘을 오랫동안 묶어놓았고 오랜 시간을 건너뛰어서 다시 무리 없이 연결해 주었다.

     

살아가는 동안 이러저러한 많은 관계에서 생각과 느낌의 결이 비슷하다는 것,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사실 로또 당첨보다 행운이다.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이유로 아주 오랫동안 보고 만나는데도 전혀 가까워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런 만남으로 우리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경험이 얼마나 많은가?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마냥 빼앗기는 내 안의 에너지를 지키고 싶은 거다.    

  

한 유명 강사의 유튜브 강의에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 들어가면서 만나야 하는 친구로서 ‘슈퍼 친구’와 ‘삽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삽 친구’란 어느 날 예고 없이 친구를 찾아가서

“00야, 나 시체를 한 구 묻어야 하는데 어떡하지?”라고 말했을 때

“응, 삽 어디 있어? 빨리 꺼내 봐.”라고 답하는 친구고

슈퍼 친구는 아주 오랜 시간 후에 만나도 어제 만난 것 같은 그냥 편안한 친구라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대로라면 내게 ‘삽 친구’가 있나? 솔직히 그건 자신이 없다. 그러나 ‘슈퍼 친구’는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 하루 종일 밥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플 것처럼 내 안이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기분이다.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다’라는 헨리 소로우의 말이 생각난다.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 형제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고 친구는 내가 선택한 거지만 가족 같은 관계라는.

인간만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종이라고도 한다.

요즘 나이 들어갈수록 친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편으론 친구가 필요 없다, 혼자일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다른 관점에서 둘 다 맞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고 역시 혼자 죽는다. 기본적으로 혼자이고 외로운 게 기본값이다. 그러나 나 혼자이고 외롭다고 스스럼없이 말해도 되는 사람, 그렇게 말하고 나면 그냥 위로가 되는 사람. 그게 친구라면 정말 좋겠다.


어느 밤늦은 시각, 통화 가능하냐는 내 문자에 에스라는 답이 오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외롭고 쓸쓸했던, 화가 나고 짜증 났던, 지치고 피곤했던 하루를, 요즈음을 털어놓았다. 한참을 들어주고 힘들었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엊그제 그랬다고 그런데 너랑 이렇게 통화하고 나니 좀 나아졌다고 말했다. 종료 버튼을 누르기 전 ‘친구야 고맙다. 그리고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꾸며대야 하는 내 프로필 대신 들춰 보이고 싶지 않은 내 안의 초라함과 보잘것없음을 보여줄 수 있는 친구. 나에게 슈퍼 친구가 있어서 정말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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