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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늘 Jan 13. 2024

내 아이는 2000년대생

“그거 너 자주 입던 셔츠인데 왜 포장하니?”

“음, 이거 팔렸어. 20만 원에. 하하.”

“뭐라고? 입던 옷을 20만 원에 팔아?”

“원래 45만 원 주고 산 건데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25만 원에 올렸는데 올리자마자 얼른 사겠다는 사람이 나섰어요.”

“아니, 그냥 평범한 티셔츠 같은데 10만 원도 아니고 45만 원이나 주고 샀다고?”

“명품셔츠치고는 전혀 비싼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산 거라 엄마한테 손 안 벌린 셈이니 뭐 그렇게 이상한 놈 바라보듯이 날 보지 마세요.”

“얼마나 좋아요? 입다가 재활용도 해서 좋고 또 누군가는 명품을 싼값에 구매함으로써 명품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고 나는 리셀해서 돈도 버니 이거 창의 경제잖아요. 하하.”     

논리에 나름 빈틈이 없는데  어쩔 수 없는  이 다른 결들이 지금은 켜켜이 쌓여 아이와 나 사이에 두터운 문턱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평범하고 성실 근면 인내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보통의 내 아이인데 하나에서 열까지 너무도 다르다. 자식도 엄연한 타인이요 다른 인격이다, 다름을 인정하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만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상황들과 매일 마주한다.


영화 한 편을 보는 데 식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활용 가능한 할인쿠폰을 찾고 피자 한 판을 시키는데도

“엄마, 제값 주고 피자 시켜 먹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며 핸드폰 화면에서 한참이나 손놀림을 하더니 거의 3분의 1 정도의 값을 할인한 가격에 주문한다. 3만 원짜리를 2만 원에. 신기하다. 아니 솔직히 너무 낯설다.

낯설어하는 나와 남편을 아이는 오히려 더 낯설어한다.

     

“이렇게 하는 거랑 렇게 하는 거 비용소모 관점에서 따져봤는데 이렇게 하는 게 10% 정도 이득이에요.”

돈에 무척 민감하다. 정확하게 따져보고 비교하고 이익이 되는 것을 다른 고민 없이 선택한다. 여타의 조건과 상황을 고려하는 것보다 금전적인 손해를 절대 못 참는다.

“내가 이거 해 줬으니까 네가 그거 해줘야 하는 거 당연하잖아?”

아이에 아주 성경 구절이다.     


 아이 수능 시험 끝나고 남편과 아이랑 나 셋이서 통영으로 여행을 갔었을 때의 일이다. 식당에서 주문하는 과정에서 남편과 사소한 일로 의견 다툼이 있었다. 남편은 메뉴를 코스요리로 주문하려고 했고 나는 늦은 점심을 먹은 후라 배도 안 고프고 사실 가격 차이도 크고 해서 단품 요리로 주문하려고 했다. 남편의 의견에 반대하자 남편은 간만에 아들 앞에서 거하게 밥을 사주고 싶은 가장의 마음이나 의도를 아이들 앞에서 거스른다고 섭섭해하며 한 소리 했고 나는 뭐 밥 먹는 거 가지고 가장의 권위 같은 거 들먹이냐고 맞받았다.   

   

사실 부부끼리 대부분의 말싸움이 너무도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서 말에 꼬리를 물며 불필요한 감정의 온도를 높이지 않는가? 머리로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 안 되는 게 사람 사이 특히 부부 사이의 말의 주고받음이다.

결국에는 각자가 따로 서울로 올라가자고 하며 식당을 박차고 나서게 되는 황당한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남편은 차를 운전하고 가고 나는 기차 타고 각자 따로 상경하자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되는.


아들은 2박 3일 부모와 동행한 여행이 끝나고 그날 밤 다시 부산으로 가서 친구들과 합류하는 스케줄이었다.      

식당 앞에서 각자 서울로 가자고 호기롭게 큰소리치며 나왔지만 사실 좀 막막했다. 날은 어두웠고 시간도 늦었고 역으로 혼자 가는 게 그렇게 난감할 수가 없었다. 그런 문제로 여전히 자존심 내세우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말과 감정을 쏟아낸 후라 수습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아들을 흘끗 쳐다봤다. 이 상황을 자식이 해결해 줄 거라는, 부모가 말다툼하는데 자식이 좀 말려주면 못 이기는 척 화해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붙들고서.

   

그런데 웬걸, 그 상황에서 아들은

“엄마, 아빠, 그럼 같이 가시든 각자 가시든 조심히 잘 올라가세요. 저는 다음 여행지에서 친구들과 만나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하며 환하게 웃는 게 아닌가? 부모의 일은 부모의 일, 내 일은 내 일임을 말과 몸짓으로 심플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당황한 건 나만이 아니었나 보았다. 어쩌면 아들의 그런 반응에 당황했다는 공통적인 감정이 남편과 나를 다시 묶어주었고 우리는 어찌어찌 화해하고 같이 올라왔다. 올라오는 내내 남편에 대한 감정보다 아들의 태도에 대한 낯선 느낌, 내 속으로 낳았으니 당연히 다 알 수 있으리라던, 예상 가능하리라던,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내 오랫동안의 게으른 확신 그날 산산조각이 났다.  

   


 저 출생 문제가 연일 화두가 되는 시대, 관련 뉴스가 나오는 날이면 나는 평소의 내 생각을 표현한다. 출산과 육아가 정말 힘들긴 하지만 생각지 못한 기쁨과 행복감을 준다고…. 그러면 내 아이는

“아이를 왜 낳아? 난 고양이나 키울 거야. 출산은 정말 불합리하고 가성비 떨어지는 일이야.”

“어차피 집 같은 건 못 사니까 비싼 차 한 대 사서 여행 다니며 사는 거지.”   

하고 결연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내 아이는 소위 MZ세대라고 하는 2000년대생이다.

바르게, 성실하게, 정의롭게, 배려하며, 더불어... 나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가치들이 2000년대생인 우리 아이 앞에서는 무용지물임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낡고 불합리한 가치로 전락한 것임을 매 순간 느끼며 살고 있다.      

팩트, 결과, output, 근거, 효율... 아이가 나랑 대화할 때 자주 쓰는 단어들이다

가치, 상황, 맥락, 의미, 과정, 의도... 는 내가 쓰는 말들이다.

“의도와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가 중요하잖아요.”

라는 아이의 말에 이어지는 나의 그것은 변명처럼 길게 늘어지기만 할 뿐 힘이 별로 없다.     

지향이 다르고, 생각하는 회로 자체가 다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엮여서 살고 있지만 내 아이와 나는 엄연히 다른 세대라는, 낯선 이질감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저만치 물러나 서 있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라는 느낌.   

   

새로운 세대를 쥐고 흔드는 시대의 파고는 정말 힘이 세다.

 ‘돈’이라는 전지전능한 신이 인간과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 그 시대정신 새로운 세대를 탄생시켰다.

어쩌다 진로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들에게 직업의 의미니, 직업 가치관이니 직업윤리니, 적성이니 흥미니 하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도 안 보는 도덕 교과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자아실현이나 성장 가능성이 아니라 ‘돈’이 된 세대.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이가 그 세대다. 그 아이와 난 무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같이 할 수 있는 지점이 있기나 한 걸까?      


정말 답을 찾고 싶어서 집어 든 책이 ‘2000년대생이 온다’였다. 갈급했다. 아이가 전혀 이해가 안 되고 그러니 의사소통도 안 되고, 같은 공간에 있을 뿐 완전히 다른 종과 같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매일 나를 어지럽혔다.  

    

초합리, 초개인, 초자율, 탈사회형 AI 인간…. 책에 나온 모든 예화는 그대로 우리 아이의 일상이고 모습이었다. 이제 막 사회로 나오기 시작한 2000년 대생들의 특징을 시대와 세대의 관계 속에서 탐색해 내며 그들의 모습을 수학 문제 풀듯이 설명해 내는 작가의 인사이트는 놀라웠고 사실 부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아하, 그래서 우리 아이가 그렇구나, 하는 이해(?) 같은 게 생겨났다. 전혀 공감하거나 동의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최소한 안 풀리던 문제를 해결한 느낌은 들었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확연히 다르고 그래서 갈등이 존재하는데 그들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 찾으며 나는 책을 읽어나갔다.      

책 마무리 부분에서 작가는

“나는 이번 책에서, 많은 분의 마음속 부담을 조금 덜어드리려 한다. 그것은 바로 ‘다른 세대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래, 이거였구나. 그나마 설루션이. 안 풀리던 수학 문제를 끙끙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정답지를 본 것처럼 허탈하면서도 마음이 편해졌다. 굳이 이해하려고 마음 쓰면서 공감하지 않아도 된다. 알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거다.


완벽하게 낯설었던 내 아이가 조금 덜 낯설어졌다.

그러나 낯섦은 덜어졌지만 또 다른 감정, 두려움이 올라왔다.

‘인간을 아주 많이 닮아가는 AI,

역으로 AI를 닮아가는 인간의 출현이 도래할 수 있다.’라는 말이 생각 나서다.

다가오는 물결은 예측이 쉽지 않다. 그 파고의 높이는 더더욱.


그럼에도 생각해 본다.

기성세대가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집값. 어릴 때부터 무한 경쟁에 내몰렸던 성장 경험. 수저론을 낳은 빈부격차. 어쩌면 그 많은 것들이 우리 세대가 그들에게 물려준 것이고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한 새로운 세대가 된 것이지 않을까?


책의 도움으로 그들을 조금 알게 되니 이해하고 싶어 진다.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 마음이 쓰인다. 아프다.     

그래도 내 아이인데, 같이 살아가야 할 우리의 아이들인데 이야기는 계속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만큼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투성이라는...

하나를 주면 둘을 받을 수도 있고...

둘을 주었는데 하나도 못 받을 수 있다는...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가슴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 지...

지금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이익을 볼 때도 있다는...

가슴 뛰게 하는 일들이 여전히 우리를 살아가게 할 것임을...  

   

그런 이야기들을 옛 이야기하듯이 천천히 들려주고 싶다. 여전히 나는 요즘 세대인 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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