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이켜보면 츠타야 서점은 그동안 방문했던 서점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인 데다가 많은 그림책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전처럼 보물 같은 그림책을 찾기 위해 여러 매대와 책꽂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츠타야 서점 역시 약간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책 큐레이션, 그림책 컨시어지
최근 들어 일상에서 큐레이션(Curation)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원래 의미는 <여러 정보를 수집, 선별하고 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전파하는 것, 출처: 국어사전>이다. 주로 미술관이나 전시회에서 특정 작품에 대한 스토리,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던 용어였으나, 북 큐레이션이라 하여 책, 서적에도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추세다.
나 또한 이 용어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으나,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게 되며 조금 더 친숙해진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도서관뿐만 아니라 서점에서도 이러한 북 큐레이션(쉽게 말하면 추천도서)이 늘어나고 있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일본에서는 그림책 큐레이션이 활발한 편이었다.
(특정 주제에 대한 북큐레이션과 컨시어지에 대해 안내받을 수 있었다.)
또한 츠타야 서점에서 눈에 띈 점은 컨시어지(Concierge)였다. 컨시어지는 본디 <호텔 투숙객에 대해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출처: 국어사전>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북 컨시어지는 독자에게 맞춤형으로 책을 안내해 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 막상 책을 읽으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망설여지기 마련인데, 이렇게 책을 안내해 주는 길라잡이가 있다면 좀 더 즐거운 독서가 되겠다 싶었다.
그림책 코너에서 처음으로 컨시어지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는데, 웬 서점 직원 분의 얼굴이 설명과 함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읽어보니 츠타야 서점 롯폰마츠점의 <아동, 그림책 컨시어지>인 직원분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그림책 설명이 아니라, 그림책을 안내해 주는 분에 대한 설명이라니. 되게 참신하다는 생각이지 않는가?
설명에는 이 직원 분이 어떤 그림책을 좋아하는지, 그림책과 관련하여 어떤 일을 하는지, 아이가 몇 명인지 등 얼핏 보면 TMI로 가득 찬 내용들이 가득했다. 일본에서는 그림책 자체나 그림책작가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서점 그림책 담당자의 가치가 크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번 설명한 <MOE 그림책상>만 봐도, 각 서점의 아동서 전문 담당자의 투표를 받아 상을 수여할 정도니 말이다.
캐릭터 위주 vs 스토리 위주
그림책들을 구경하다 보니 눈에 띄는 캐릭터가 있었다. 바로 포켓몬. 남녀노소, 전 세대를 아우르는 귀여운 포켓몬이 영유아 서적과 그림책에도 있었던 것이다. 포켓몬 그림책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확실히 일본은 캐릭터에 대한 2차 활용을 정말 잘한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매력 있는 캐릭터들이 있기에, 이렇게 다양한 옷을 입을 수 있는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노라네코군단을 보면 이 야옹이들도 얼마나 잘 만들어진 캐릭터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림책 속에서 캐릭터의 매력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새삼 느끼게 된 부분.
(귀여움이 한가득이었던 책꽂이들. 노라네코군단의 신간도 미리 볼 수 있었다.)
그림책을 보다 보면 스토리 속에 캐릭터를 집어넣거나,혹은 캐릭터의 매력이 강해서 캐릭터가 스토리를 빨아들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내가 만들었던 그림책을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스스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기에,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상하는 것을 자주 고민을 하곤 했다. 그러던 찰나에 이렇게 일본 후쿠오카에서 캐릭터성이 짙은 그림책을 자주 접하니, 아이디어가 점점 확장되는 기분이 들었다.
(종이 접기로 표현된 캐릭터들이 너무 귀엽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도 얼핏 봤던 귀여운 토끼 그림책인 <딸기가 좋아! 토끼 베이커리>. 이 그림책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무려 종이 접기로 상품화가 되었다. 캐릭터가 얼마나 인기가 많고 매력이 있으면 이렇게 종이 접기까지 나올 수 있을까. 그림책은 아무래도 시각적인 요소가 큰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캐릭터 구상에 있어서도 상당한 공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보면 그림책은 정말 복합적인 창작물임에 틀림없다.
다양한 특징을 가진 그림책들
츠타야 서점은 그동안 방문했던 서점과는 또 다르게 다양한 그림책들이 있었기에, 서점에 갈 때마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그림책의 크기, 디자인, 표지, 색감, 캐릭터, 스토리 등을 복합적으로 바라보며 내가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을 열심히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그림책들이 몇 권 있었다.
(가로로, 세로로 길쭉한 그림책들.)
그림책치고 되게 길쭉한 책이 있었는데, 한국 작가분의 그림책이었다. 알고 보니 달리에서 나온 <숲속도서관> 임서하 작가님의 그림책. 어디서 많이 본 스타일이다 싶었는데 괜히 반가운 기분이었다. 작가의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그림책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앞으로 세상 밖에 모습을 드러낼 내 그림책들도 독자들이 나를 떠올렸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세로가 아니라 가로로 길쭉한 그림책도 있었다. 표지와 고양이의 디자인이 그림책보다는 하나의 그림 작품 같달까. 차분한 느낌의 표지 질감과 고급스러운 황금색 글자, 거기에 감각적인 디자인의 고양이까지. 그림책이 아니라 집에 전시해도 될 법한 고급진 책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마지막 장의 지도 표현은 내가 좋아하는 표현기법이다.)
앞서 언급한 포켓몬 그림책도 꽤 흥미로웠다. 그림책에 맞게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배경과 귀여운 포켓몬들. 피카츄와 이브이가 기존 이미지보다 더 통통한 것도 귀여움을 더하는 데 한몫하는 듯. 그림책 각 페이지에서 나타나는 구도, 배경, 색감은 내가 공부하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일본 그림책은 아기자기한 표현을 세세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 어떻게 내 스타일로 표현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206쇄 그림책이 실존한다니?
다양한 책들을 구경하다가 가장 놀란 그림책이 한 권 있었다. <わたしのワンピース>, <나의 원피스>라는 제목의 그림책.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의 색감이라 눈길이 갔는데, 약간 오래된 그림책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용을 본 후, 뒷면을 보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수치이긴 하다. 약 55년 동안 사랑받는 그림책이라니.)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69년. 그리고 현재까지 총 206쇄나 된 그야말로 조상 격의 그림책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2020년 한솔수북에서 <나의 원피스>로 번역된 그림책이기도 했다. 206쇄. 숫자만 봐도 엄청난 책인데, <빨리빨리 레스토랑의 비밀>로 2쇄를 찍어 본 내 경험 상 말도 안 되는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쇄가 높아질수록 책의 판매부수도 꾸준하게 높아진다. 도대체 이 그림책은 그동안 얼마나 많이 팔린 것일까. 그 정도로 국민적으로 사랑받는 그림책이라는 말이겠지?
좋은 그림책은 시대가 바뀌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좋은 그림책이라는 기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고,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이때 얻었던 신선한 충격은 꽤 오래가지 않을까.
(구도 노리코 신간의 한 장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다.)
노라네코군단 신간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림책을 그려도 내 의도대로 판매가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로 큰 예상을 하지 않았어도 많은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그림책들을 보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그림책도 이렇게 사랑받기 위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감탄과 고민, 여러 감정이 오고 가는 시간이었다.
츠타야 서점까지 방문한 후 분명한 것은 내가 바라보는 그림책에 대한 시야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독자로서 바라보는 그림책과 작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림책은 또 다르게 느껴질 터. 이 당시 두 번째 그림책 원고는 완성된 상태였지만, 앞으로 준비하게 될 새로운 그림책은 이러한 내 경험이 스며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다 느꼈다.
이러한 과정은 머리가 아프고 복잡하기도 하지만,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에 대해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의미 깊은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