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림책 여행은 츠타야 서점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후쿠오카 그림책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큰 규모의 서점인 마루젠, 기노쿠니야, 준쿠도, 츠타야 정도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서점의 규모가 클수록 다양한 그림책을 접할 수 있지 않겠어?라는 마인드였기에 하루하루의 일정은 이 서점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계획했던 또 다른 서점이 두 군데 있었다. 한국에서 유명하지는 않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후쿠오카에서 소규모 그림책 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서점들의 존재를 안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규모가 작지만 그림책에 대해 더 탐구하고 새로운 그림책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또 내가 만든 그림책을 선물로 드리면서 그림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즐거운경험이지 않을까?'
후쿠오카 여행을 계획하며 캐리어에 먼저 넣은 것은 내 명함을 붙인 <빨리빨리 레스토랑의 비밀> 두 권. 한국의 그림책작가가 일본의 그림책 서점에 방문하여 그림책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서로에게 신선하면서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어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기초 회화정도는 할 수 있었기에 번역기의 힘을 빌리면 소통은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급 추진하게 된 계획이었다.
여행의 둘째 날과 셋째 날에 각각 한 군데씩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 곳은 방문을 했고 한 곳은 방문하지 못하였다. 절반의 성공을 한 셈. 내가 방문한 곳은 <ちえの木の実>라는 서점이었다.
지혜나무의 열매(Chienokinomi Fukuoka, ちえの木の実 福岡店)
한국에서 소규모 서점에 대해 찾을 때 일부러 많은 정보를 찾지는 않았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겪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쿠오카, 그림책 서점이라는 키워드만으로 검색을 하다 알게 된 곳이 <ちえの木の実, 이후 지혜나무의 열매>였다. 아동서적도 있고 그림책을 취급하는 작은 서점이라는 포스팅을 보고 이곳은 꼭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상황. 결과적으로는 이번 후쿠오카 그림책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서점이 되었다.
여행의 둘째 날 오전. 가방에 내 그림책을 집어넣고 지혜나무의 열매로 발걸음을 향했다(이전에 포스팅했던 준쿠도 서점은 이후에 방문하였다). 지하철 나나쿠마선을 타고 도착한 곳은 야쿠인역. 하카타에서 4개 역 정도로 멀지 않은 위치였다. 야쿠인역은 되게 생소한 곳이었는데, 바로 올라가면 텐진미나미역이 있을 정도로 하카타와 텐진에서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였다.
참고로 이번 후쿠오카 여행 시 지하철 나나쿠마선(초록색 노선)을 자주 이용했다. 이 노선은 텐진미나미, 야쿠인, 롯폰마츠 등을 전부 지나가기에, 후쿠오카의 여러 서점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추천한다.
(드디어 도착한 지혜나무의 열매. 순간 망설임이 생기기도 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꾸역꾸역 걷다 보니 지혜나무의 열매 서점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서점의 느낌과는 다르게, 사무적인 느낌이 강한 건물 1층에 조그마하게 꾸며진 공간이었다. 간판이 크게 있지 않아 자칫하면 지나칠 뻔했다. 내부에 들어갔을 때 서점의 규모는 생각보다 큰 편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 서점 입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마음 속에서망설임이라는 꽃이 피었기때문이다.
그동안 혼자서 작업을 하며 내향적인 성격이 좀 더 커졌던 나에게 유일하게 외향적으로 재잘재잘 말할 수 있는 소재는 그림책이었다. 그 생각만으로 일본까지 와서 그림책에 대해 소통을 하려 한 건데, 막상 일본어로 대화를 하려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대화를 조금이나마 이어나갈 수 있을까? 뭐, 답은 정해졌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안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가기로 마음먹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질러보자라는 생각을 가진 채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지혜나무의 열매 후쿠오카점 내부. 출처: chienokinomi-books.jp)
서점 내부는 위 사진보다 어두운 분위기에, 주황색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것이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거기에 몇 아이들이 책을 보며 뛰놀고 있었으며, 어머니들께서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정말 현지 일본 서점에 온 것이다. 심지어 성인 남성은 유일하게 나 혼자. 일본인이 아닌 사람도 나 혼자. 그 장면만 놓고 보면 되게 웃긴 장면이었다.
또한 구조는 1.5층 형식으로 되어있었으며 여러 그림책들이 멋지게 진열되어 있었다. 서점 내부 사진은 찍지 못하였는데, 내 머릿속은 이미 하얘지기도 했었고 현지 분들이 자연스럽게 계신 모습에 무언가 함부로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평일 대낮에 외국인 남성이 혼자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주목받을만한 일이었기에 조용히 그림책에만 집중했다.
직원분은 1명 계셨는데, 이 분께 말을 걸려면 우선 그림책을 한 권 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짜고짜 내 그림책을 내밀기보다 이곳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는 게 기본 도리가 아닐까. 여러 그림책들을 구경하다가 기왕 그림책을 살 거면, 내가 좋아하는 그림체의 책을 사자고 생각했다. 확실히 대형 서점에 비하면 소규모였기에 그림책을 훑어보는 데 시간이 엄청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후쿠자와 유미코의 그림책을 발견했다.
(내 눈을 사로잡았던 후쿠자와 유미코의 그림책.)
<のねずみチッチ, 쥐 칫치>라는 이 그림책은 후쿠자와 유미코 작가 특유의 색감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이 작가의 그림책들을 보면 다들 비슷한 색감,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데 그게 작가 특유의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아직 국내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미출간 작품이었다. 서점에 있던 이 당시에는 몰랐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책 한 권을 찾아서 구매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림책으로 소통하다
구매할 그림책도 골랐겠다, 이제 계산대에서 계산할 일만 남았다. 계속 뻘쭘하게 책꽂이 앞에 서있을 수만도 없었기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직원분께 말을 걸었다. 기껏 생각해 낸 말이 "저기요"였지만. 지폐를 내밀고 거스름돈을 받고, 비닐봉지에 담긴 책을 받고. 그리고 완벽하진 않지만 "저는 한국의 그림책 작가인데요. 이곳에 제 그림책을 선물하고 싶어 왔어요"라고 말하는 데 성공했다.
원래 지혜나무의 열매에 방문하기 전, 치에라는 아주머니께서 운영하는 서점인가?라는 생각을 했었다(치에라는 뜻이 지혜라는 의미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약간 연륜이 느껴지는 사장님이 계실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젊은 여자 직원분이 계셨다. 그래서 더 말을 거는 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그 직원분께서는 엄청 놀란 눈치였다. 바꿔 생각하면 우리나라 소규모 서점에 일본 그림책작가가 서툰 한국어로 그림책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으니 말이다. 내가 생각해 봐도 놀랄 수밖에 없긴 했다. 심지어 이 때는 수염을 기르고 있던 터라, 인상이 더 강렬하지 않았을까.
걱정과는 다르게 다행히 내가 이야기하는 것들, 그림책에 대해 반겨주셨다. 나한테 맞춰 쉬운 대화를 이어나가셔서 그런지, 직원분과의 대화에서 95%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도쿄와 가고시마, 그리고 후쿠오카에 위치한 나름 체인으로 운영되는 그림책 서점이었다. 그리고 내 그림책을 좀 더 규모가 큰 가고시마 지점으로 보내겠다는 말까지 해주셨다. 초면인데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시다니, 감동 그 자체였던 순간이었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고, 어떤 작가를 좋아하고, 일본의 그림책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을 짧게나마 전할 수 있었다. 내 그림에 대해 귀엽다고 하시며, 스토리를 궁금해하시기도 하고, 한국어를 조금이나마 읽으시는 모습 등 재미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빨리빨리 레스토랑의 비밀 중) "안녕히 계세요."
직원: (글자를 읽으며)안녕히 계세요.
나: 어,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직원: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거든요. 조금 읽을 수 있어요.
나: 제 그림책은 달리라는 출판사에서 만들었는데, 이 출판사는 미야니시 타츠야의 <고녀석 맛있겠다>를 한국에서 번역했어요.
직원: 앗, 여기도 그 그림책 있어요. (그림책을 들고 와서 보여주시며) 일본에서는 ポプラ社라는 출판사에서 나왔어요.
나: 이름이 신기하네요. 포푸라라니.
이런 식의 대화가 반복되었다. 중간의 어색한 텀 또한 있었지만. 일본어 회화 중 긴 문장을 계속 사용하는 건 어려웠기에 내 대답은 거의 2-3살 수준이었으나, 그림책에 대해 함께 소통한다는 점은 값진 순간이었다. 원래 물어보고 싶었던 점은 거의 까먹어서 한국 여행이나 일본 여행 등에 대해서 대화하는 등 스몰토크를 하기도 했다. 너무 좋은 시간들이었지만 유일하게 힘들었던 점은, 내 온 신경을 직원분의 대화에 집중했어야 했기 때문에 계속 식은땀이 났다는 점이다.
입가에 미소를 띤 상태로 눈과 모든 감각, 신경은 직원분의 말에 집중을 하는 상황. 지금 생각하면 웃긴 모습이기도 하다. 번역기를 돌려가며 대답하기도 하고 꽤 대화를 했다고 생각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1시간가량이 지났다. 외국인과의 프리토킹을 이렇게 해보다니. 내 부족한 일본어 실력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 모든 대화를 잘 받아주신 직원분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채 서점에서 나왔다.
계획했던 소규모 서점을 방문한 후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 이것도 말했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이렇게 용기를 낸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분명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였는데, 왜 이렇게 몸은 땀범벅이었을까. 카페에 들러 시원한 커피를 마신 후에야 여유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 분명 잘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감한 것은 행동하는 것, TO DARE IS TO DO. 잠시 잊고 있었던 내 다짐이 다시 한번 마음속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