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기억은 한몸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스물두 살의 청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3일 오후 1시 30분쯤 서울 을지로 6가 17 평화시장 앞길에서 시장 종업원 전태일 군이 “노동청이 근로조건 개선을 적극 협조해주지 않고 있다”고 분신자살을 기도, 중화상을 입고 성모병원에 입원 중 14일 새벽 숨졌다. 전군은 1시부터 청계천 5가-6가 사이의 평화, 동화, 통일 등 3개 연쇄 상가 종업원 5백여 명과 근로조건개선 등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하려 했으나 경찰과 시장 경비원들의 제지를 받자 가지고 온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댕겼다.“(<조선일보> 1970. 11. 14일자/ 출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한국 노동운동사에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자, 사건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보도와 사회적 관심은 초라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언론에 비중 있게 보도되지 않았다. 기사량은 언론사별 10건 내외에 그쳤다. 일부 신문은 그의 장례를 단신으로 보도했을 뿐이다. 사건 한 달 뒤, 언론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그 해 가장 중요한 뉴스는 전태일 사후 한 달 뒤에 발생했다. 12월 15일 새벽 1시경 제주와 부산을 오가던 화객선 남영호가 침몰했다. 이 참사로 ‘최소’ 319명, ‘최대’ 337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앞 ‘최소’, ‘최대’라는 표현은 승선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사망자 수를 확정할 수 없어서다. 하지만 ‘최소’로 셈하더라도 남영호 참사는 건국 이래 발생한 인재 중 사망자가 가장 많은 재난이었다.
이 참담한 기록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로 502명이 사망하고 917명이 부상을 입으며 깨어졌다. 하지만 남영호 참사는 여전히 단일 시공간에서 발생한 재난 중 사망자가 두 번째로 큰 재난이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남영호 침몰을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정부나 검찰보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고, 이를 보도하며 사건 윤곽과 은폐된 사실을 밝혀냈다. 이윤을 쫒은 무리한 과적‧과승, 미진한 정부 관리감독이 침몰 원인이었다. 정부가 조난신호를 무시하고 늦장 구조에 나서면서 희생자가 규모가 증폭했다는 점 역시 언론이 밝혀낸 사실이었다. 서슬 퍼런 독재정부 시기에 언론이 정부를 정조준했다. 언론은 “3백여 생명은 숫제 강제로 수장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라고 날을 세웠다.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에 국회는 한국 재난사 최초로 국회 차원의 ‘남영호 침몰사건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이하 남영호 특위)를 구성했다. 정부 역시 한국 재난사 최초로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면서 빠른 진화를 시도했다.
남영호 침몰은 그해 <동아일보>가 뽑은 1970년 10대 뉴스 1위였다. 참고로 3위는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 참사, 8위는 수학여행길 교통사고로 대규모 학생들이 희생된 모산, 원주 수학여행 참사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전태일의 죽음과 사후 파장을 가장 비중 있게 보도한 일간지였지만 전태일의 죽음을 10대 뉴스로 선정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역사의 결말은?
전태일의 죽음은 사람들 마음에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자들의 단결과 노조 결성을, 지식인들의 노동운동 참여를 촉진했다. 어떤 이는 노동현장에 위장 취업했으며, 어떤 이는 전태일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내놓기도 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금기어였고, 정보가 통제된 독재정권 시대에 전태일 정신이 확산될 수 있었던 데는 <전태일의 육필일기 복사본>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전태일은 생전에 노트 5권 분량의 일기를 남겼는데, 그중 일부가 복사되어 암암리에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서 사회를 변화시킬 용기를 북돋운 것이었다. 이후 전태일의 정신은 『전태일 평전』으로 유명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조영래, 1983), 『전태일 전집-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전태일 저, 1988), 『어머니의 길』(구술 이소선, 정리 민종덕, 1990)등의 기록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15년 뒤 화려하게 부활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를 위한 열망이 거리를 휩싸고,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전태일은 대중 속에서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모두 아는 바와 같다.
반면 남영호 참사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빠르게 잊혔다. 정부가 희생자 위로금을 빠르게 지급하고, 이후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내는 등 시간 종결을 서두르면서, 언론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서귀포항에 세워졌던 위령비가 소리 소문 없이 중산간지역으로 이전됐다. 이후 남영호는 유사 선박 재난 발생 시에도 사례로조차 거론되지 않았다. 남영호가 소환되기까지는 무려 45년 세월이 걸렸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국가의 구조 방임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면서 세월호 참사와 ‘쌍둥이’, ‘도플갱어’, ‘평행이론’ 등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영호 참사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여전히, 매우 낯설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 4·3 항쟁 이래 가장 큰 참화로 기록되는 제주에서조차 노인 세대를 제외하고는 남영호 참사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기록적으로도 남영호 참사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1970년 당시의 행정 처리 문서와 관련자의 회고 글, 제주도 관련 서적, 당시 신문 등에서나 흔적을 찾을 수 있고, 해운 분야의 논문에서 간단히 언급된 정도다. 참사의 피해규모와 특수성, 당시의 파장 등을 감안할 때 이례적이다.
50년에 가까운 세월의 풍화작용으로만 보기엔 같은 해의 전태일의 분신과 격차가 크다.
이 두 사례는 기록과 기억이 자연발생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기록과 기억 모두 진공상태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사회적인 산물이다. 사회적 기억과 집합적 기억은 물론이고 이 둘을 떠받치고 있는 개인적 기억이라는 것조차 항상 사회적 힘에 영향을 받는다. 기억의 생산과 보존, 전승을 위한 유용한 도구인 기록 역시 생산 여부와 관점, 방향, 내용 등에 있어 사회적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당대의 권력, 이데올로기, 사회적 환경, 기록 생산자의 입장 등에 따라 기록은 서로 다르게 생산되고 유통되며 보존된다는 점에서, 모든 기록은 편파적이고 주관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당대 권력의 치부로 여겨질 두 사례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기록이 왜 부재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서슬 퍼런 위협 속에서도 전태일에 대한 기록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유통되었는지도 이해 가능하다.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했던 이들은 전태일의 죽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그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관련한 기록을 생산, 유통, 보존해왔다. 반면 남영호 침몰은 근대화 발전의 과도기에서 발생한 재난 중 하나로 인식되면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지금이었다면, 어떤 기록이 남게 되었을까? 역사를 가정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게 없다고 하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와 노동열사/산재 피해자의 기록 수집, 생산 등을 비교해본다면 기록 생산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기록은 인물, 사건, 공간 등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며, 기억의 생성과 구성, 소멸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