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18
세상 물정 모르던 대학교 졸업반 시절에는 그냥 아무 회사나 빨리 취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게 들어간 아무 회사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망감과 좌절감을 느꼈고, 이직을 결심하게 되었다.
뭔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일사천리로 모든 게 진행되었고 거의 한 달여 만에 원하는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생일날 입사하게 되었다.) 이직에 성공하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겠다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 얼떨떨한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했다.
"친구야! 나 이직했어 이제 떠나자!"
한창 윤 식당을 재밌게 보고 있던 터라 그곳에 나오는 스페인 테네리페 섬 작은 마을 가라치코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윤 식당을 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음에 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제 갓 병아리를 뗀 신입사원이었고, 왕창 휴가를 내서 떠나기엔 배울 업무가 너무 많았다. 가라치코 마을까지 가려면 이동하다가 내 휴가가 모조리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안 되겠다. 노선변경이다.
"스페인에 가자!"
스페인의 도시들을 소개한 블로그를 둘러보니, 세상에! 이 작은 마을들이 하나같이 다른 분위기라니! 게다가 내가 꿈꿔온 곳들임에 틀림없다.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진 내 여행 메이트도 좋다고 하니 여행지는 스페인으로 결정한다. 그다음 항공권, 그다음 도시 선정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일주일 휴가를 내고 떠나는 여행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그 나라를 온전히 느끼고 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계속 이어졌다.
참, 회사에 휴가도 말씀드려야 했는데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여름에 스페인에 가보고 싶다고 틈틈이 말하는 작전을 세우고 실행했다. 원래 계획은 이틀이나 삼일 정도 휴가를 사용하려 했는데, 회사 직원 분들이 극구 말리며 평일을 통째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팀장님께서는 젊을 때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고 나중에 휴가 내기가 더 힘들기 전에 빨리 떠나라! 며 쿨하게 결재를 해주셨다.
내 여행 메이트 영서랑은 옛날부터 계획을 세울 때 공책 한 장을 쭉 찢어 여행 날짜에 맞춰서 종이를 접어 칸을 나눈다. 무조건 아날로그. 꼬질꼬질한 종이에 손글씨로 쓴 계획표를 가지고 다니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프로계획러인 우리는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하며 분 단위로 계획을 짠다. 아마 여행을 쉼이라고 생각하여 무계획으로 떠나거나 일정을 여유롭게 세우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갈 수 있지만, 이게 우리의 방식이고 이렇게 부지런히 여행해야 '아! 여행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이렇게 계획 이야기를 해대는지 싶다면,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절반이 계획 세우는 설렘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말에 호수공원 앞에 있는 2층짜리 카페에서 접선한다. 평일에 각자 알아본 여행 스폿들을 공유하고 어디를 갈지 확정하고 난 후에 숙박을 결정하고 예약까지 한다. 그리고 우리만의 플랜을 완성시킨다. 플랜 A만 짜면 불안하니까 플랜 B 어쩔 땐 플랜 C까지 짜고 나서야 계획 짜기를 끝낼 수 있다. 하다못해 숙소에서 재정비하는 시간과 점심 먹으면서 먹어야 할 비타민까지 이 플래너에 들어가 있다. 여행에 꽤 전투적으로 임한다. 그게 우리 스타일이다.
"일정 하나 틀어지면 아주 그냥 큰일 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