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세상
2019년 8월 19일
이상하게도 타국에 오면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진다. 너무 기분 좋게도 하얀 침대 위의 하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기상을 한다. 오늘은 하루 전체를 온전하게 이 나라, 이 도시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날이다. 우리의 일정은 오전 7시 네르하 근교의 마을에 가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프리힐리아나는 온 마을이 하얀색으로 뒤덮여 있어 스페인의 산토리니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무조건 첫 차 타야 해."
전날 무시무시한 코스요리 덕분에 늦게 잠에 들어 피곤할 법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상쾌한 몸을 이끌고 경쾌한 발소리를 내며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처음 느껴보는 네르하의 아침은 내가 꿈꾸던 그대로였다. 새들 지저귀는 소리, 적당한 바람, 햇빛이 가까이에 있지만 덥거나 습하지 않은 그런 딱 좋은 날씨.
"우린 날씨 운이 정말 좋아"
프리힐리아나행 버스를 기다리는 버스정류장에서는 목적지가 다른 사람들이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그 나라에 잘 없는 동양인이기에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샌프란시스코 아저씨가 있었다. 궁금한 게 많은 물음표 아저씨는 어느 나라에서 왔니? 이 나라 어때? 대학시절 전공은 무엇이고, 졸업하고 나서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니? 등등 우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자기 명함을 쓱 내밀며 난 이런 회사에 있는데, 돌아가면 메일 한 번 보내라는 말을 남기며 말라가행 버스로 홀연히 사라졌다. 잘 가요.
"그나저나, 우리 버스는 왜 안 오는 거야?"
계획대로라면 7시 20분에 오는 버스를 타야만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소식이 없다. 안 되겠다.
"영서야 나는 매표소 가서 한번 물어볼게."
"응. 그럼 나는 저 앞에 버스가 맞는지 한번 가볼게."
말 안 해도 완벽한 팀플레이로 한 명은 매표소에 줄을 서고, 한 명은 우리를 지나쳐간 버스 기사님께 물어보러 전력 질주한다.
"현서야! 빨리 와! "
영서가 버스 앞 문을 손으로 꽉 잡고 버스 기사님께 거의 빌고 있었다.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탓에 거기 서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목적지가 프리힐리아나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영서가 버스 문을 잡고 친구 한 명 더 올 거라고 기다려주시면 안 되겠냐고 빌었더니 세상 천사 같은 인자한 얼굴로 웃으시며 노 프라블럼이라고 했다고 한다. 내가 여행을 다녀보면 얼마나 다녔겠냐만은 다른 해외 여행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풍경이나 음식이라면, 스페인은 단연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사람들의 정과 인간미 때문에 계속 생각나고, 또 오고 싶은 나라가 되게 한다. 참 신기하다. 어릴 적에는 김밥나라에서 김밥 주문하는 것도 무서워 덜덜 떨던 내가 지금은 용감하게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이 버스가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맞는지 물어보러 혼자 매표소에 가는 용기를 내다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금세 프리힐리아나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펼쳐진 풍경은 온통 새하얀 건물과 그에 걸맞은 자갈길. 그리고 내 키보다 훨씬 큰 야자수와 고개를 하늘로 들어야 꼭대기가 보이는 높은 산.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듣기 좋은 새소리와 종소리 그리고 거리거리마다 자리 잡고 풀향기를 맡는 고양이들. 그리고.....
"오렌지주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분위기 좋은 카페 밖에 써진 오렌지주스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지만 강한 햇빛 때문에 더위를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다. 100% 오렌지라고 해서 정말 오렌지 즙만 나오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더운 여름에도 얼음 없이 미적지근한 오렌지를 꽉 짜서 주스를 만들어주시는 사장님.
"이엘로 뽀르빠보르(얼음 주세요)"
더듬더듬 우리가 스페인 말을 하면 몇 번 갸우뚱하시다가 금세 눈치채시고는
"Oh, Ice?"
"Yes, How much?"
"Free"
여행할 때마다 얼음과 물은 항상 추가 요금을 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얼마냐고 물어봤지만 이곳 사장님은 씩 웃으며 공짜야!라고 하시면서 엄청 큰 얼음 덩어리를 굳이 예쁜 잔에 각각 담아 주신다. 더위에 지친 우리들은 그가 천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초록 대문에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를 가진 그곳에서 우리는 잠시 뜨거워진 몸을 식히며 또 한 번 이 나라에 반한다. 아침부터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는 여러 사람들 덕분에 이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
"Gracias"
프리힐리아나에서는 대문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보라색, 연두색, 노란색 여러 가지 색깔로 빚어낸 대문들과 그 옆에 유행처럼 키우는 큰 화분들과 고양이.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마을이라 그곳을 구석구석 돌아보곤 파워 J형의 계획에 따라 다시 네르하로 돌아갔다. 꿈같았던 프리힐리아나.
다시 네르하, 이 바닷가 시골마을에서 나에게 약간의 귀여운 추억을 안겨주었다. 도시보다는 시골여행을 더 즐거워하는 우리는 애착 슬리퍼 하나에 몸을 맡긴 채 구석구석 열심히 걸어 다녔다. 해 질 무렵 네르하의 바다에는 뜨거운 태양이 작열했고 사람들은 뜨거움이 익숙한 듯 온몸이 새빨개진 채로 다이빙을 하거나 수영을 하며 온전히 그 시간을 즐겼다. 햇빛이 바다에 부서져 너무나도 반짝이게 빛나는 잔물결들이 또 한 번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그러던 중 광장에서 열심히 뛰어노는 새끼 강아지들을 발견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상당한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진짜 귀엽다. 진짜 너무 귀엽다."
"진짜 귀엽다. 대박."
정말 신기한 것은 이 1등 호들갑 리액션을 보고 강아지 주인이 새끼 강아지를 번쩍 안아 들더니 우리 보고 만져보라고 했다. 서로의 언어가 이렇게 틀린데, 몸짓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니. 그래 우리가 보통 호들갑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감사의 뜻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강아지의 젤리 같은 발바닥을 몇 번 만졌다.
"Gracias"
이따금 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고양이들과 야자수 나무의 초록색 앵무새들은 동물 애호가인 우리의 기분을 더 귀엽게 만들어주었다. 웃다가 춤추다가. 시간이 흘러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신나 있었다. 아침의 네르하. 낮의 네르하. 밤의 네르하. 두 다리로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하나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저 행복했다.
그날 밤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네르하 광장으로 가는 길에 그 많은 인파 속에서 후두둑 코피가 터졌다. 휴지 조각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바닥에 뚝뚝 피를 흘리면서 숙소로 돌아가는데도 그냥 실실 웃음이 났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밤하늘이 너무나도 까맣고 그늘을 만드는 하얀 천들이 그저 너무 예뻤다. 행복하다.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