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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트 Oct 07. 2022

포기하지도 못하는 이유

장수-생(長修生)

발음 [장수생]
품사 「명사」

1. 입학시험이나 입사 시험 따위에서 여러 번 낙방한 뒤에 다음 시험에 대비하여 공부하는 학생.


 국립국어원에서 2016년부터 운영 중인 사용자 참여형 온라인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 장수생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정의다. 한자어만 그대로 풀이해보아도 ‘오랜 기간 공부하는 학생’ 정도가 되겠다. 하지만 장수생의 정의를 한 번 더 꼬아 생각해보면, 불합격이라는 결과를 수 차례 받고도 포기하지 못한 학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공무원 준비생 커뮤니티를 보면 4, 5년 차를 넘어서는 장수생들이 분명 많은데, 이 많은 장수생들이 시험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시험에 떨어지는 이유 말고, 시험에 그렇게 떨어지고도 포기를 안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 주변 수험생들과 온라인 게시글 그리고 나의 사례로 나름 고민해보았다.


 첫 번째 유형은 극소수이기는 하나, 진심으로 공직에 뜻이 있는 유형이다. 국민의 봉사자가 되고 싶다는 큰 포부나 그 직업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다. 4년 차 경찰 준비생인 지인은 자신이 경찰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조금은 흥분한 목소리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진짜 멋있지 않냐?’ 하곤 했다. 소방관을 꿈꾸는 또 다른 지인도 명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소방직 준비를 시작했다. 


 두 번째 유형은 개인적인 성향과 상황에 따라 공무원의 근무 환경이나 혜택 등이 본인에게 최선의 조건이라 판단한 유형이다. 정년 보장이나 연금, 출산 휴가 및 출산 후 복귀 등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이 있다. 이것들이 본인의 인생 계획에서 유용한 혜택이라 판단하여 공무원 시험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유형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은 합격자의 수기를 읽어보며 공부 방법을 점검하고 ‘열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나도 시험 합격에는 실패한 사람이라 덧붙일 말이 없다….)


 마지막으로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유형이다. 내가 속한 유형이다. 나 말고도 적지 않은 장수생들이 이 유형에 속할 것이라 감히 추측해본다. 다음은 시험공부도, 시험 포기도 하지 못했던 당시 내가 자주 했던 일련의 생각들이다.


1. 공백 기간이 길면 사기업에서 싫어한다던데.

2. 나이 많은 무경력 백수 받아줄 곳이 어디 있겠어.

3.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4. 사람도 무섭단 말이야.

5. 그냥 하던 거 하자….


 이 두려움의 원천은 무엇일까. 무지(無知)다. 집과 독서실만 오가며, 가족 외에는 대화할 상대도 전무하다시피 한, 가진 경험이라고는 20대 초중반 수준에 머물러 있는(그러나 실제 나이는 서른 언저리인), 그러니까 사회생활 경험이 또래에 비해 현저히 적은 한 개인이 스스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한계는 딱 저만큼까지였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논문을 발견했다. 루터대학교 정근하 교수는 '공무원 시험 장수생들의 사회적 연계 단절에 관한 연구'에서 장기간 낭인 생활을 하고 있는 공시생들은 스스로 선택한 연계 단절로 말미암아 궤도수정을 위한 자원과 정보의 동원이 매우 어려워진 상황에 처해져 있다고 말한다. 또한 공시 장수생들 간의 재제휴(re-affiliation), 즉 동질성이 강한 사람들 간의 연계는 정보의 중복성과 편향성을 야기하여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인적 자본, 정보 자본, 문화 자본으로의 접근을 방해하고 자기 합리화를 강화한다고 한다. 나 또한 이 나이에 아무것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르바이트밖에 없을 것이라 속단하면서 ‘아르바이트는 몇 살까지 할 수 있으려나.’ 했고, 전화번호까지 바꿔가며 인간관계를 다 쳐내고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만 연락하면서 ‘우리 1년만 더 하면 될 거 같아. 이번에는 꼭 합격할 거야.’ 하면서 시험 외에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좁아진 시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온라인상에서 장수생이 낙방하는 유형을 분석하는 글은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수없이 낙방하고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정리한 글은 찾기 힘들었다. 장수생의 방향은 오로지 ‘시험 합격’으로만 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른 방향으로의 고민은 꺼리는 듯하다. 정근하 교수의 말처럼 나 또한 공시 장수생들의 궤도수정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직업으로서 공무원은 자아실현의 관점에서 분명 유의미한 직업이며 생계수단과 복지 측면에서도 장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의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지도, 포기를 하지도’ 않으면서 고립된 채 스스로를 괴롭히는 이들에게 충동질을 해주고 싶다. 눈앞의 수험서를 덮고 한번 정도는 딴생각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충동질을. 지난날 내게 필요했던 것이 이 충동질이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장수생'. 우리말샘. https://opendict.korean.go.kr/dictionary/view?sense_no=788341&viewType=confirm

정근하. "공무원 시험 장수생들의 사회적 연계 단절에 관한 연구." 문화와 사회 19 (2015): 13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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