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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선생 Oct 27. 2024

인생이라는 오딧세이

- 비로소 나로 사는 느낌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은 이타카라는 도시국가의 왕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연합군으로 트로이전쟁을 10년간 치르고 승리하여 귀향길에 오른다.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이 바로 그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 앞길엔 또 다른 고난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을뿐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물자를 구하기 위해 섬을 약탈하고 방심하고 있을때 역공을 당해 절반의 부하들을 잃는 일은 마치 그의 불행의 서막을 알리는  했다.


물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외눈박의 섬에서 인질되었다가 그의 눈을 멀게 하고 도망치는데, 오디세우는 그때 그만 경솔한 행동으로 외눈박이의 저주를 사게된다. 하필 그가 포세이돈의 아들이기에 그의 저주는 오디세우스에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오디세우스는 낙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부하를 돼지로 변신시킨 마녀의 섬에 머물며 그녀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그녀의 도움으로 저승에 가서 죽은 예언자를 만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듣기도 한다. 그렇다고 저주의 운명을 피할수는 없었다. 태양신의 섬에서 신의 소를 잡아먹어 부하들과 배가 난파되어 홀로 어느 혼자사는 칼립소라는 요정 섬에 7년간 머물기도 한다. 오디세우를 사랑한 칼립소는 그를 놓아주지 않지만 오디세우스는 간절히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렇게 그는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신들의 도움을 받아 20년만에 홀로 고향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20년간 비워둔 궁궐을 차지하며 자신들 중 하나와 왕비가 결혼하여 새로운 왕이 되고자 하는 귀족 청년들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수호신 아테나 여신과 다 자란 어린 아들과 여전히 충직한 몇몇의 하인들과 그들을 물리치고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잠시 아내와 아들과 아버지와 반가운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나게 된다. 아직 포세이돈의 저주를 풀지 못한 오디세우스는 바다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어느 곳에 가서 노를 나무 심듯 심고  포세이돈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포세이돈의  저주가 풀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10년의 전쟁, 10년의 귀향 뒤에  고향을 떠나 바다없는 곳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끝나지 않는 모험으로 이뤄진 그의 인생이야기는 우리의 인생을 비유,상징하고 있다. 이 오딧세이 또는 오디세이아라 불리는 오디세우스의 모험 이야기는 내가 사는 내내 힘이 되었다. 전쟁을 이끈 영웅에 한 나라의 왕인 오디세우스 인생이 그 어떤 인생보다도 험난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꺽지 않는 그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때론 불운에 때론 행운에 안주할 법한데 그는 고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왜 그토록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을까?


사실 그를 맞이한 것은 자리 비운 왕의 자리를 탐내고 있는 귀족청년들뿐이 아니었다.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리며 절개를 지키는 아내, 갓난 아기때 떠난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아들, 죽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왕을 여전히 사랑하는 충직한 돼지치기, 오디세우스 몸에 난 흉터를 보고 다 늙어빠진 거렁뱅이가 자신이 키운 왕임을 알아보고 기쁨의 소리를 속으로 감추어야했던 유모가 그를 애타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치 주인을 기다리다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듯 행색을 감추고 궁궐로 향하는 오디세우스에게 두엄더미 위에서 죽어가면서 꼬리를 치던 오디세우스의 개가 그를 이곳으로 오도록 이끈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오디세우는 그를 믿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자신을 변함없이 기다리는 그들을 두고 그가 어떻게 다른 곳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겠는가. 그의 귀향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곳에 나의 정체성이 있고, 그곳에 모두가 있으니....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읽을때마다 이것이 나의 삶이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장소가 그 자체가 아닐터다. 그 장소에서 느낀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억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쓸모있는 존재가 아니어도 사랑받았던 그때를 우리 모두는 평생 그리워하는 것일 테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나는 최대한 '무쓸모'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 직업적인 역할을 제외하고 직업적인 역할에서도 그 동안 '구원환상'으로 과도하게 열정을 쏟아 부었던 것들을 걷어내는 중이다.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야 버림받지 않는다는 무의식을 인지하고 구원환상을 버려야겠다고 결심하고도 그 오래된 습관은 관성처럼 지속되었다.


"나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어보세요"


최근에 이 유년을 주제로 한 글을 쓰고,  상담 선생님이 준 미션을 수행하던 중 우울함이 찾아왔다. 비오는 날도 잦아지고  기온 급격히 내려가 쌀쌀해서 이불 속에 더 있고 싶어졌다. 움직이기 싫어지고 다시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금기하던 음식들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우울을 합리화하면서 나는 다시 나를 돌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누워있는 나를 일으켜 세운건 우리집 개였다. 나와 산책 가기를 기다리는 반려견의 눈빛을 도저히  모른척 할 수 없었다. 끙 소리를 내며 나는 우리집 개와 밖으로 나왔다. 순간 싸늘해진 공기가 코끝에 스치고 가을의 낙엽 냄새들이 나의 우울한 감각들에 싱싱한 생기를 넣어주는 듯 했다.  


기분은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우울했다. 나는 왜 반려견 산책을 다른 가족에게 미루지 않고 직접하고 있지? 적어도 2주간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말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녀석은 '나없으면 안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또 강력한 책임감이 발동되어 반려견 돌보는 산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년을 애도하다]를 통해 나 자신을 글로서 직면하는 과정이 꽤 힘들기도 했거니와 구원환상으로 타인을 돌보는 습관을 버리는 와중에 나는 스스로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발동되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 버려질 지 모른다는 무의식이 건드려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너는 내가 없으면 진짜 안되는구나 하면서 귀찮음을 떨쳐내고 반려견 산책에 나섰던 것인지도...문득 다시 찾아온 우울함의 정체가 분명해지자  눈물이 핑 돌았다.


산책 간식을 달라는 반려견에게 간식을 주면서 맑디 맑은 개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가 보였다.간식을 줘서, 밥을 줘서, 산책을 시켜줘서 날 사랑하는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상관없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나의 반려견은 내가 산책을 생략해도 밥을 늦게 줘도 보채기는 해도 나를 미워하진 않는다. 언제나처럼 내 옆에서 언제나 같은 정도의 애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물섞인 콧물이 흘러 내리려는 소매 훔치자 거짓말처럼 구름 가려졌던 해가 반짝 얼굴을 내미었다. 마음 속의 정체모를 우울함의 안개가 걷히듯  맑아졌다.


그렇게 집에 돌아 온 나는 남편에게 사실 내가 몇 주 동안 우울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가 반려견 산책 중에 그 우울한 이유를 알고 우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당분간 모두에게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 볼래


선뜻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내 남편은 자신이 감당할게 많아진다는걸 수긍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선언을 믿는 눈치는 아니였다. 나의 깊은 공포와 불안으로 타인이 원치 않는 돌봄을 내가 멈출 수 있는지,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타인을 향한 잔소리를 완전히 멈출 수 있을지 나 자신도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정말 내가 아무 쓸모가 없어도 타인들이 과연 내 옆에서 나를 사랑해줄 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정하고 요 며칠 나는 무쓸모한 존재가 최대한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나의 예민함이 발동되어 불편해지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때론 못되게, 때론 못나게 구는 중이다. 어린시절 하지 못했던 투정과 사춘기때 하지 못했던 반항들을 해보는 중이다. 이런 나를 미워하고 싫어할까봐 버림받을까봐 걱정되고 두려워 불편해지는 마음을 참아보는 중이다. 대신 나에게만 좋은 사람, 충실히 내 마음을 우선 이해해보는 시간을 갖는 중이다.


나이가 얼마가 되었든, 내가 엄마든, 선생이든, 아내든, 이건 나를 두르고 있는 역할이란 옷이다. 어쩌다 어른이 되었고 이미 늙어가는 중이지만 마음속 나는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했다. 그걸 이젠 열심히 숨기지 않고, 그런 허약한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를 내는 중이다.  이상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구원받기 위해 구원자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 아니 이젠 그래야한다.


어쩌면 그러다 나만 남을 수도 있다. 그렇게 행여 나 혼자 남더라도 적어도 ''는 남아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나는 스스로를 절대 버리지 않을 테니까. 괜찮다. 결국 구원의 시작도, 끝도 나 자신인것 같다. 어쩌면 이 무쓸모의 시간 끝에서 비로소 '나'로 살아가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남은 진짜 나를 사랑하는 몇몇의 타인들과 살아가면 될 것이다.


타인의 쓸모와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 아닌 그저 나로 존재하며 나이기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길. 그래서 나는 드디어 용기를 내었다.


미움 받을 용기를....
진정한 나만의 오딧세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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